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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의 증흥처 일지암 복원

우록(友鹿) 선생은 일지암을 ‘乳泉이 콸콸 솟는 茶人들의 勝地 일지암’ ‘차의 勝地 일지암’ 이라 표현했다. 탁월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해남에서 싹튼 차문화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포문(佈文)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지암 복원을 위하여 미친 듯이 설쳤던 선생은, 다인이라면 누구라도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멋진 문장을 만들어 낸 셈이다. 그것은 일지암을 복원하기 위하여 세인들에게 던진 하나의 메시지이며 일지암 복원을 위한 캐치프레이즈였다.
실로 명쾌(明快), 상쾌(爽快), 호쾌(豪快)한 표현이다. 해남 다인들이 공유해야 하는 명문구(名文句)이다.
그러하매 오늘 한국의 다인들은,‘차의 승지 일지암은 차의 본토(本土)이며, 한국 차 문화를 알려면 해남의 다인들을 먼저 알아야 한다.’라는 말에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하면서 일지암을 본토로 하고 있는 해남의 차 역사를 적는 것이다.
대흥사의 13대종사 중 마지막 대종사인 초의선사는 쇠퇴해 가던 차의 맥을 이어 가기 위하여, 일지암을 발원지로 차를 널리 융성토록한 차의 중흥조이다. 더불어 일지암이 차의 중흥처요 차의 승지 인 것은, 조선조 말 거유석학들이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초의 차를 극찬하면서 차를 나누며 다시(茶詩)를 지었고,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할 때에도 찻잔을 앞에 하고 서로의 그리움을 시로 만들어 전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 하나의 큰 요인은 일지암에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이 쓰여 졌으며 너나없이 초의선사를 다성(茶聖)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육우 있고 조선에 초의선사 있으며 일본에 천리휴(千利休)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에 해남의 다인들은 일지암 복원을 서둘렀다.
동시에 해남의 다인들은 일지암 복원과 함께 한문시어(漢文詩語)로 기록되어 있는 <초의시고(草衣詩藁 )>,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 등의 초의선사 가 남긴 역작들을 번역하여 널리 세인들에게 알리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결의하게 된다. 다음은 몇 분 다인의 증언을 토대로 차의 중흥처 일지암 복원기를 재구성하여 싣기로 한다.

일지암 복원기

유천이 콸콸 솟는 다인들의 승지

초 의 장 의 순 結庵

사단법인 한국차인회 復元

김 봉 호 記錄

다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가보는 차의 승지 일지암, 초의선사와 다산, 완당, 연파, 호의, 하의가 차의 진수를 깨친 곳, 일지암은 들뜨고 허둥대고 설쳐대는 우리들을대자연으로 돌아오라 손짓하는 도량(道場)이다.

일지암 복원을 위한 역사적 준비 전야(前夜)

1976년 8월 하순 어느 날 오후 전남 해남의 비처(鄙處)에 전화가 걸려왔다. 진주의 대아중고등학교 교장 박종한(朴鍾漢)선생이었다. 반가운 손님들을 모시고 올꺼라는사연이었다. 박 선생과는 차의 일로 대흥사와 그곳 응송(應松) 박영희(朴暎熙) 노장 댁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구면이었다.
그 오후가 지나고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손들은 나타나지 않더니 밤 9시경에서야 세 대의 차가 들이 닥쳤다. 좁다란 내 서실에 들어 선 손들은 박종한, 손상봉(孫相鳳), 박동선(朴東宣), 박태영(朴兌泳), 조창도(趙昌道), 서일성(徐一聲), 석도범(釋道梵) 제씨였다.
수인사가 끝나자 손들은 입을 모아 초의선집(草衣選集·拙著)을 칭찬했고 이어 차를 거듭 마시면서 다례와 다문화 보급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속출하였다.
손들은 진주에서 출발하여 몹시 피로해 보였는데 식전인 듯 하다 안에다 대고 저녁을 지으라는 내 호령을 극구 저지하면서 바로 광주로 떠난다며 전화로 호텔 예약을하더니 화제가 조금씩 구체화 되어가자 이번에는 광주행을 취소하고 해남에서 하루를 묵기로 하였다. 그럭저럭 11시가 되었는데 새삼스레 저녁을 지을 수도 없고 읍의 식당들은 이미 문을 닫았을 터이어서 내가 천일관(天一館:해남 토속식당)에 전화를 걸었더니 거기 역시 종업원들이 귀가했다는 것이었으나 간청간청해서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화제를 이어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12시가 지난 데다 그 날이 군 단위의 무슨 행사가 있었다 하여 여관마다 방이 없다는 것이다. 내 집에 방은 댓 개 있으니까 그리로 가자거니 밤중에 그럴 수 없다거니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 경찰서의 형사 한분이 나타나서 방을 두 개 구했으니 쓰라는 것이었다. 고맙기 이를 바 없었으나 그래도 방은 모자랐으므로 우리들은 타협 끝에 그 방 두 개와 내 서실을 쓰기로 하여 궁색한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내 서실에서는 박종한, 손상범, 박태영 세 분과 내가 밤을 지샜다.
각설하고 그날 우리가 합의를 본 사항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다문화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다인들이 한데 모여 모임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나라 차의 중흥조인 초의선사의 일지암을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들과 나는 가까운 시일에 날짜를 잡아서 서울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상은 그 날 밤 긴박했던 상황을 전하기 위해 우록 선생의 원고를 그대로 실었다.

한국차인회와 일지암복원추진 위원회 결성

제1차 일지암 복원추진위원회의 모임은 1976년 9월 어느 날, 서울 오류동의 박동선회장 댁에서 있었다. 그날 참석자는 대략 16명으로서 명단은 아래와 같다.

    우록 김봉호, 박동선,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 박태영, 김미희,
    정승연, 박종한, 손상봉, 임경빈, 이영노, 황태섭,
    조창도, 김종희, 차재석, 장명석 제씨였다.
그날의 모임은 일지암을 복원하자는 데 뜻을 함께한 분들이어서 화기애애,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안건은 아무 異意 없이 처리되었다. 정식 발족은 그 후의 일이었지만 그날이 한국차인회와 일지암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서울에서의 1차 모임 이후, 일지암복원추진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76년 10월 5일 이었다.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위 원 장 : 김봉호
    부위원장 : 박종한, 김미희
    이 사 : 김종희, 임경빈, 이영노, 고범준, 정영복, 장명식, 이정애, 박태영, 황태섭, 임광현, 유종선, 도범, 정승연, 차재석
    상무이사 : 조창도
    사무국장 : 이광종
    고 문 : 최범술, 신형식, 박동선
    지도위원 : 안광석, 정명수, 이을호, 허건, 김종해, 김운학, 이덕봉.

이상과 같이 결성한 위원회에서는 우선 전국 다인들과 각계에 다음과 같은 취지문을 발송하였다.

一枝庵 復元 趣旨文

일지암이라 함은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소재 대흥사 사찰내에 있었던 한 암자입니다. 지금은 주춧돌과 깨진 기와가 남아 있을 뿐 옛 모습은 간데없지만 문헌또는 구전에 의하면 이 암자는 ㄱ자 四간의 그 셋째 간을 다실로 꾸민 조그만 가람을 중심으로 유천과 연지와 자죽으로 둘러싸인 유수(幽遂)한 구조였다고 합니다.
이 일지암은 보제존자 초의대종사가 1826년(순조26년)에 결암(結庵)하였습니다.
초의스님(俗名 張意恂)은 전남 무안 삼향에서 출생, 15세 때 나주 남평의 운흥사에서 축발하고 19세 때 대흥사로 옮겨 대교수학 후, 잠시 화순 쌍봉사, 경주 불국사에 머문 적이 잇고 일지암 결암 후에도 금강산 등 명산과 경향각처를 자주 주유하였으나 81세에 입적할 때까지 줄곧 여기에 머물렀습니다. 초의스님은 여기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즉 經과 禪에통달했으며 시문, 서, 화 삼절이요, 특히 사라져가는 다도를 바로 세운 茶人이었습니다.
한국의 陸子羽, 한국의 蘇廣, 혹은 한국의 茶仙이라 일컫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리고 다도의 진수를 밝힌 <다신전>과 <동다송>을 저술하였으며 멋과 맛을 깊고 넓게 터득한 선비와도 상통했던 초의스님의 일지암을 복원하는 일은 우리나라 다도를 바로 세우는 捷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동다를 되찾고 이를 널리 振作할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다도의 뿌리를 되살리는 일과도 같은 일지암 복원불사에 江湖諸賢의 협조 있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76년 9월20일

일지암 복원 추진위원회

현장 연락장소―전남 해남읍 학동 811 대둔학회 전화 : 해남 3400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지은 조그만 암자로서 전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특히 일본의 다인 천리휴(千利烋)가 지었다는 대암(待庵)의 구조와도 비슷하다. 그 암자를 짓도록 선두 지휘한 천리휴가 도래인(渡來人)이 도움을 주었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면 우리의 암자 양식을 본받았다고 생각되는데 아무튼 그 소박한 일지암 복원을 유달리 서두른 것은 그 암자가 건축 미학상의 가치가 있어서도 아니고 종교의 측면에서 중시된다 해서도 아니며 그곳이 유별나게 경치가 좋아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초의선사의 정신이 깃든 한국 차의 성지이며, 차 중흥의 요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명, 일지암 터를 찾아라

일지암 복원취지문을 작성하고 추진위원회에서는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현장을 확인하는 것이며 둘째, 원형을 추정하여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장 답사는 전후 10여 차례 실시했는데 해남다인회 회원, 서울 부산 등지의 다인들, 대흥사의 스님들과 동행했다. 어느 날 고생 끝에 틀림없이 일지암 터라고 확신하면서 가설계도까지 그리고 자축회도 열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 자리는 일지암 터가 아니고 신월암 터’라고 증언한 이가 있었다. 일행은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특히 우록 선생의 낭패해 하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대흥사의 사찰림은 900ha이나 되었고 그 안에 절터가 100여 곳이나 되어서 분간하기 어려웠다는 점과, 대흥사의 스님들과 인근 주민들 중에 현장을 알고 있는 분들이 모두 작고했다는 점이다.
위원회에서는 문헌으로 <남다병서 南茶竝序>. <몽하편병서 夢霞篇竝序>. <대둔사지 大屯寺誌>를 더욱 면밀히 살펴보는 한편, 대흥사 사정에 밝은 응송 박영희 스님(당시 90세)의 고증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암자터(지금의 자리)를 확정지은 것은 응송 스님을 현장으로 모시고 간 1977년 2월 하순이었다. 암자터는 대흥사의 대광명전으로 부터 동남간으로 1700m거리에 있었는데 현장은 낙엽과 토사로 뒤덮여 형태를 분간 할 수 없었고 아름드리 잡목이 우거져서 그곳이 과연 일지암 터일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나 산에 오르기 전에 응송스님과 낭월 고재석스님이 말한 백일홍과 두 층으로 된 연못을 확인하고 나서야 확증을 얻었다. 그 날은 응송스님, 낭월스님, 박종한, 김제현, 김두만, 김봉호, 조자룡 제씨가 입회하였다.

고증에 의한 일지암 설계

다음은 건축 설계였다. 추진위원회에서는 회의를 거듭한 끝에 에밀레 박물관장이며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구조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자룡 씨에게 일지암 설계 를 부탁하기로 합의했다. 조자룡 씨는 우선 한국의 전형적인 다실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 무던히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을 위시하여 전국을 샅샅이 뒤졌다.
어느 땐 조자룡씨 혼자서 찾아다녔고 어느 때는 우록 선생과, 또 어느 때는 박종한씨와 일지암에 맞는 고증을 찾아 무던히도 발품을 팔았다. 그때마다 각처에 있는 전형적인 다실 사진을 찍어 추진위원회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기도 했다. 그때의 사진은 무려 300여장이 넘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 조자룡씨와 추진위원들은 대체적인 윤곽을 잡아나갔다. 현장 배열(地割)도 구상이 되었다.
일지암은 5,5평의 정사각형 초가(芽屋)로 하고 법당 겸 주택은 장차 모임으로 활용할 수 있게 15,5평의 호즙(互葺)으로 내정하고 가설계를 만들어서 서울의 진관사에서 열린 총회에 의견을 상정하였다. 총회에서는 별다른 이의 없이 일지암 설계 내용과 예산 추정액 1500만원을 통과시켰다. 중요한 것은 공사비 염출은 전액을 회원의 희사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복원 공사 추진

건축설계가 끝나고 해남군청에 건축허가를 제출하는데 필요한 구비서류(形質變更願 등)를 만드느라고 무려 2개월, 그 허가를 얻어내는데 3개월, 도합 5개월의 시일이 걸렸다. 그런 다음 설계에 걸맞는 고건물을 구하느라고 또 다시 전국을 누비며 다닌 결과 일지암은, 해남군 옥천에서 구했으며 법당 겸 주택은 여천의 공업단지에서 구하여 얻었다. 그 한편으로는 등산로의 개설을 위해 택지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가장 문제되는 것은 자금이었는데, 그 자금이 일시에 입금되는 것이 아니고 전후 10여 차례에 걸쳐 수금되었다. 당시 상무이사 조창도씨의 증언에 의하면 공사가 종결되었을 때까지의 희사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미희 600만원, 박동선 500만원, 유관열 100만원,
    박종한 70만원, 장명식 50만원, 부산다인회 50만원,
    서양원 50만원, 강영모 고순영 50만원, 대구다인회 30만원,
    조창도 이광종 13만원, 이덕봉 10만원, 조소수 10만원,
    조자룡 10만원, 황태섭 10만원, 김명지 10만원,
    조승연 5만원, 고범준 5만원, 차재석 3만원,
    여규현 3만원, 차범술 5천원.

합계 1,579만5천원

공사는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다. 현장에서 고건물을 뜯어오는 일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그것을 트럭에 싣고 대흥사의 개울에 가교를 만들면서 건너는 일과 대광명전에 하차하여 거기서 부터 일지암까지의 1,700m 산길을 지게로 운반하는 일이 큰 고역이었다.
그때가 1979년 7월 한 여름이었다. 찌는 듯 한 더위와 함께 경사가 급하고 험한 길을 인부 한 사람이 평균 서까래는 2개, 기와는 7장을 지고 하루 4차례 오르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일이 고되다 하여 인부들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맨손으로 하루에 한 차례씩 오르내렸던 우록 선생의 새 등산화가 공사가 끝날 무렵에는 걸레가 되었다며 얼마나 힘든 공사였는가를 후일담으로 얘기했다.
그러는 가운데 실무자들을 더 애먹인 일은 사찰 측의 비협조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찰 내에 유서 깊은 암자 하나를 지어서 고스란히 헌납하겠다는데 싫어할 까닭이 없을 터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유인 즉, 대흥사는 백파 문중인데 초의선사는 생전에 백파에 대해 선사상으로 정면 대결한 선사이니 달갑지 않은 존재란 것이었다.
우리 추진위원회 측에서는 설령 백파스님과 초의스님께서 선사상의 논쟁을 벌였다 하더라도 그 논쟁은 속세의 감정싸움이 아니라 학문적이며 종교적인 입장에서 누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사상적인 선의의 주장이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또한 초의선사는 대흥사의 13대 마지막 대종사 위에 올랐던 분으로서 초의선사의 여러 면모 중에서 대흥사 일지암에서 중흥시킨 차에 대한 영역을 평가하자고 하는 일인 터, 우리 추진위원회에서는 백파선사와 초의선사의 선사상 논쟁 때문에 불편하다는 대흥사 사찰 측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함과 동시, 해남 대흥사 일지암이 차의 성지임을 강조하며 사찰측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비협조적이었던 사찰 측과의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일을 하다보면 아무리 넉넉히 예산을 세웠다하더라도 예산보다 더 들어가는 것이 태반이다. 일지암 복원공사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예산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은 그 험하고 가파른 산에 길을 만들면서 건축자재를 옮기는데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어갈 것인가를 정확히 예상하지 못했던데 원인이 있었다.
추진위원회에서는 5~6백만 원 더 추가 될 것 같다는 예상 아래 모연미술전(募緣美術展)을 계획하였다. 모연미술전이라 이름 붙인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날 남종문인화의 대종을 毅齊 허백련, 南農 허건으로 봤을 때 남농의 부친이 米山 허형이며 미산의 부친이 小癡 허유인 터, 그렇다면 소치의 첫 번째 스승은 초의선사이며, 또 하나는 두 번째 스승인 阮堂 김정희를 초의선사가 만나도록 연을 맺어주어서 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로 보아 작금의 수많은 호남 화가들은 대체로 그 연원(淵源)을 초의선사로 소급할 수 있다는 견해에 의한 것이었다.
모연전(募緣展) 출품 권고에 대한 반응은 의외였다. 남농을 비롯해서 경향 각지의 많은 작가들이 1~3점씩 선뜻 희사해 주었다. 추진위원회에서는 초의선사의 연원을 높이 사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일지암복원을 추진했다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까지 일었으며 한 마음으로 고마워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옛말이 하나 틀린데 없다고 위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희사자 명단은 아래와 같다.
    許 健, 金漢永, 辛永卜, 金承姬, 文章浩
    趙邦元, 金炫章, 金玉振, 朴亢煥, 朴鍾會
    李仁倍, 成仁鎬, 朴南俊, 李晟在, 李旺載
    徐榮洙, 吳禹善, 田選鐵, 徐喜煥, 千昞權
    秋順子, 河南鎬, 丁西鎭, 禹熙春, 朴飛鳥
    千昞玉, 朴兌泳, 徐正?, 鄭命壽, 金明齋

위와 같은 희사자들로 부터 작품이 모였지만 처분 문제로 또 한번 고민하게 되었다. 요는 畵商에게 넘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번거롭더라도 전시회를 열 것인가, 하는 두 가지 방향으로 회의에 붙여졌고 회의 끝에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그것이 작품을 선뜻 희사한 분들에게 추진위원회에서 보일 수 있는 예의였다.

일지암 복원을 위한 미술전

인사말씀
저희들은 뜻한 바 있어 한국차인회를 구성한 지 어언 2개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희들은 우리나라 茶文化復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고 또 첫째 사업으로 추진 중인 일지암 재건공사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일지암은 시서화 삼절이며 근세의 다성인 초의선사 장의순스님이 전남 해남 대흥사의 경내에 結庵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지암에서 ‘茶禪一如와 茶之九難과 茶之九德의 實을 擧楊하면서 二禪來義, 四辨漫語, 茶神傳, 東茶頌, 草衣集 등의 명저를 기술하였거니와 그는 또 그곳에 蟄居하는데 그치지 않고 蔬荀氣와 習氣를 떨쳐버린 채 당대의 名流인 홍석주, 홍현주, 김정희, 권돈인, 신자하, 정약용, 이노영, 윤정현, 그리고 연경의 翁樹棍, 翁樹培, 葉志銑 등등 각계각층과 학연을 맺었기로 한 때 이 일지암은 차를 모채로 한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核心的 존재였습니다. 韓國茶亭의 한 전형이었던 이 일지암은 초의스님 입적(1866)후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작금, 경향각지의 뜻있는 인사들이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1400여년을 이어온 다문화를 융성케 하고자 盡力하는 此際에 그 근원을 찾는 작업인 일지암 복원공사에 남농 허건 화백을 위시해서 많은 저명미술인 제씨께서 작품을 모연하였기로 이와 같이 전시회를 여는 바입니다.
江湖諸賢의 아낌없는 조력 있으시기를 伏願 하면서 인사말씀 가름합니다.

일지암 복원 추진위원회

일지암 복원을 위한 미술전은 위와 같은 인사 말씀으로 초대장을 보냈고 1979년 6월27일부터 1주일간 서울시 중구 예장동의 숭의음악당에서 <일지암 재건을 위한미술전>을 열었다. 그 결과 총 수입은 약 1,000만원 이었으나 표구비와 다인회 총회를 겸한 리셉션과 비품구입 기타의 경비 등등 지출이 거의 500만원 정도여서 실질적 복원공사를 위한 수입으로는 500만원이었다.

落 成

공사를 끝내고 나서도 문제는 남았었다. 일지암의 암주 스님을 물색하지 못했다. 입주를 원하는 사람은 사찰 측에서 마땅치 않아 했고 사찰 측에서 원하는 사람은 본인이 입주를 거절하였다. 숙의 끝에 석용운(釋龍雲) 스님이 입주를 했고 헌납제(獻納祭)를 연 것은 1980년 4월15일 이었다.

다음은 낙성식에 초대하는 초대장을 그대로 싣는다.

일지암 복원 落成에 즈음하여 초대의 말씀

梅花滿發하고 冬柏爭艶하는 이 가절에 선생님 존체 균안하실 줄 믿습니다.
아뢸 말씀은 저희들이 한국차문화 啓導를 標榜하면서 捷徑의 사업으로 추진 중이던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 복원공사가 완공되어 그 낙성식을 4월6일 오전 10시에 갖겠습니다.
한국의 차문화 발전에 한 획을 긋는 이 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협조하여 주신 선생님을 이 제전에 모시고자 합니다.
바쁘시더라도 期於 枉臨하셔서 좋은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1980년 4월

한국차인회회장 李 德 鳳

대흥사 주지 智 牛

일지암복원위원장 金 鳳 皓
合 掌

一枝庵 重建序

乙未年夏閏六月에 한 庵子를 湖南勝地大興寺頭輪峰下 九曲溪上 烟樹之間 白雲之下 北菴之南 南菴之北 山腰舊址 窈窕幽明之處에 重建하였으니 이것이 飄然情舍一枝菴이니라.
이 일지암은 本寺 13大宗師인 草衣禪師가 始建하였으며 中間에 한번 重建한 庵子로서 場圃築前 鑿成一池 하였으며 手栽奇花異草 紫?鳥? 庭除, 紫霞擁門 白雲入室 松風拂軒 蘿月暎窓하여 가히 幽人이 起居할만한 곳이더라.
이곳에 雲林高土 宏儒碩士가 從遊하였으며 江湖詞伯이 吟詠한 記錄이 歷歷하니라.
本是 草衣禪師는 博究八萬大藏經 不惰戒律 禪餘博涉經史 兼究茶道하였으며 海居 홍현주의 請으로 동다송을 著述하였으니 이는 육우의 茶經과 優劣을 가릴 수 없는 고로 後人들이 그를 [東國의 茶宗]으로 推仰하였느니라.
원래 우리나라 茶道는 멀리 新羅時代부터 由來하였거니와 南方 山野各處에 茶樹가 尙存하고 있어서 이는 茶 가 널리 愛用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近世의 茶風屢經은 叔世之源이로다. 이로써 洞察컨데 茶道의 興旺 不興旺은 國政의 善治不善治와 關係한다 아니할 수 없느니라.
現下 邦道全盛 勢列列强함에 여러 茶人들이 茶道를 復興하려 할세, 復興기 道는 先欲之其宗이라 此一枝菴重建之好?緣이 施主하였기로 直視始工 同年 十月 訖工 益庚申年四月 落成式을 擧行함에 있어서 이 序文을 쓰다.

다음은 일지암 복원 당시 작성된 상량문 전문을 싣는다.

一枝庵 上樑文 [1]

靜觀萬物
劫數懷成住壞空 常理有消長進退
是以
廖渴大海?渴爲瀝劫之盡也 嵬峨泰山崩頹成沙理之窮也
況其混沌之內
獨能剛固 何不盡窮
惟此一枝庵
百歲劫壽盡而空 永歲常理窮而廢
射影蟄於庭中 夷田巢於壇側
但見左右牛羊放牧竹松狼藉增濊
如聞晝?陰魂泣訴風雨慇懃助亮
藤蘿榮路差似庵?鳥鼠同?之所
荊?遮空?成業海禍惡不息之處
有儒佛?茶群眞
四海文客 彌天畵伯
眞感幽興募良緣於入域
性懷特發遂至願於十載
乃成登玆樓以搖?乘暇日而消憂
方得憑軒檻以遠望向北風而開襟
占氣侯景 揆節伺辰
散紅流出於奇花之源 嫩綠凝?於嘉木之岸
淑姿皓月如臨石鏡之峯 幽馥紫霞正對香爐之岳
於是乎?察時今
歲次協洽 月旅林鍾
辛丑繞日 乙未御辰
修樑豊柱幽房靜室陰映於林間
開戶放門芳卉?紅香濕於澗壑
漢漢高山深谷??泉石之膏盲
曄曄紫芝可以療饑煙霞之痼疾
枕流可洗聾俗之耳 潛跡可緘愼言之口
老栢蒼松蘇勝舊之芳姿 江燕林鶯獻賀新之淸唱
兒卽偉兮抛樑東
榮枯盛退古今同 雲橋架壑揷靑空 底物紫雲?終不見
兒卽偉兮抛樑西
無妨俗客到幽捿 多荒石搖正如梯 多少橋?橫九曲
兒卽偉兮抛樑南
偏憐一?緣波涵 雙峯磨漢碧如藍 嶺外澄瀛連萬里
兒卽偉兮抛樑北
晝?不息除紛惑 鬱鬱綠陰幽興極 林外潺緩石澗流
兒卽偉兮抛樑上
幽懷不盡登高望 天河萬里?銀浪 方覺江山急雨過
兒卽偉兮抛樑下 重陰綠樹時維夏物色懷新氣味淸
伏願上樑之後 追晦鄙恥散去 福善嘉慶驟集
四依之俊傑熟讀陸羽之三篇
六和之賓朋飮渴盧今之七椀
臥看晴天浮雲解醒宿醉之氣
邀來碧澗明月蕩?昏寐之意
紫荀之香與乾坤而永大
白兎之味將一月而無窮

海南茶人會
金斗萬 金鳳皓 朴容壕 梁基泰 梁載坪 劉俊植
趙周元 全春基南琪祐 金濟炫 林璂洙 鄭宰洪
朴奉炫 韓炳壽盧時康 金常宗 尹光鉉
獻文
己未年 閏六月 十日 海南茶人會一同 獻撰

조용히 우주만물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성겁, 주겁, 괴겁, 공겁을 거쳐 재액을 품으며
그 이치는 항상 모자라면 길어지고 나아가면 물러나는 자연의 섭리이다.
이 때문에
큰 바다의 넓고 깊은 물도 말라 없어지면 오래도록 물이 흘러 다함이요,
아미산같이 크고 괴이한 산도 모래가 되는 이치로 다하게 된다.
하물며 자연 그대로 일 때,
홀로 강하다고 하지만 어찌 다 함이 없겠는가.
오직 이곳 일지암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 수명이 다하여 공허하게 될 것이고
긴 세월 지나면 항상 다함의 이치에 의하여 폐허가 될 것이다.
곤충의 유충은 흙속에서 꿈틀거려 나오고
날다람쥐는 단 옆의 숲에 둥지를 틀 것이다.
다만 보이는 것은 좌우로 소와 염소를 놓아기르니
대나무 소나무 사이로 어지럽게 뛰어놀고
마치 들리는 것은 밤낮으로 떠도는 귀신이 울면서 하소연한 것 같은데
비바람도 은근히 슬픔을 자아낸다.
등나무 넝쿨이 궂은 길에 엉클어져 해가지는 곳에서는
새와 쥐가 같은 굴속에서 살게 되고
가시덤불이 하늘을 가리니 업보의 세계를 이루어 재앙이 멈추지 않게 된다.
불가와 유가에서는 참된 이에게 차를 권하는 이가 있었다.
글 재주꾼 그림 그리는 화백들은 온 세상에 가득하니
참된 느낌이 그윽이 일어나고 고상한 생각이 특별히 솟아난다.
널리 훌륭한 시주자를 모집하여 이 집을 완성하고
한가한 틈을 타 우러러 바라보면서 근심을 없애준다.
마침내 오랜 소원 이루고 비로소 집 난간에 기대어
멀리 북쪽 풍경 바라보니 마음속이 후련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기상을 점치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절기도 헤아리고 날씨도 살피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 바치는 붉은 꽃은 진귀한 꽃밭에서 얻어 내고
연한 초록색 잎은 아름다운 나무가 서 있는 언덕에서 나온다.
아리따운 자태의 밝은 달은 거울 같은 봉우리에 떠 있는 것 같고
그윽한 향기가 가득한 아름다운 노을은 향로봉에 걸려있다.
여기서 시절을 살펴보니
해는 기미요, 달은 음력 6월이다
신축의 날이요 을미의 시다
튼튼한 기둥에 들보 얹고 꾸밈이 풍만하고 조용한 집 그윽한 방은
숲 사이로 그늘져 보인다.
방문 열고 대문 열면 향기로운 붉은 꽃이 휘날리는데
산골물이 흐르는 골짜기에도 향기에 젖어든다.
넓고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물은 구불구불 흐르며
아름다운 자연의 흐름도 어둠도 그대로 드러내고
윤기 있는 자주빛 버섯은 굶주림 면해주고
산허리에 둘러있는 안개는 걷힐 날이 없다.
무지하고 깨치지 못한 사람의 귀는 침계루 아래 흐르는 물이 씻어주고
신중히 말하는 사람의 입은 종적을 감추듯이 닫게 한다.
늙은 잣나무와 푸른 소나무는 좋은 경치에서 아름다운 자태 뽐내고
물위의 제비와 숲속의 꾀꼬리는 새로이 맑은 노래 불러 하례한다
어영차 들보를 동쪽에 드니
구렁에 다리 놓은 운교는 푸른 하늘에 솟아있고
아래 바닥에 서있는 자줏빛 왕대나무는 마침내 볼 수가 없지만
사람의 영고성쇠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어영차 들보를 서쪽에 드니
험준한 돌길은 마치 사다리 같고
크고 작은 다리는 아홉 구비 돌아 흐른다.
속세의 나그네 쉬어가도 무방하리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드니
두 봉우리 물에 비춰 푸르기가 쪽물 같고
고개 너머 큰 바다는 멀리 연해 있고
외롭게 젓는 노는 파도를 탄다
어영차 들보를 북쪽에 드니
풀 나무 우거진 숲은 녹음이 짙고
숲 밖의 개울물은 돌 사이를 흐르며
낮과 밤으로 쉬지 않고 걱정을 덜어주네
어영차 들보를 위로 드니
은하는 멀리 은물결 번득이고
마치 강과 산에는 소나기가 지나간 것 같네
그윽한 회포는 높은 산에 올라봐도 다하지 않네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드니
푸른 숲 짙은 그늘 우거진 여름철이요
좋은 경치 맞으니 속이 시원하고 심기도 맑다
두건 벗어 이마를 드러내고 정자에서 잠드네
바라건데 들보를 올린 후로는 후회와 부끄러운 일은 흩어지고
복되고 즐거운 일만 있게 하소서
지덕을 갖춘 선비에게는 육우의 삼편을 숙독케 하고
가까운 손님에게는 노동의 차 일곱 사발을 마시게 한다
누워서 맑게 갠 하늘의 뜬구름을 보고 지친 몸을 일으켜 깨워
먼 시냇가 밝은 달을 맞아 사리에 어두운 마음을 씻는다.
좋은 차향기는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함께 하고
깨달음의 맛은 장차 해와 달처럼 한이 없으리라

일지암 상량문을 읽고 있노라면 인간이 일생에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또는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를 말하고 있다. 한편의 아름다운 산문시와 같다.

一枝庵 上樑文 [2]

本一枝庵은 只今부터 壹百五拾餘年前 草衣禪師께서
建立하여 住錫하시다가 建物老朽로 自然 敗寺되어 오던 중
今般 禪師를 追慕하고 길이 記念하고 韓國茶道를
復興시키고 草衣禪師의 높은 禪茶精神을 再顯코자
韓國茶人協會에서 募金하여 本一枝庵을 復元하게 되어
己未閏六月十日 未時上樑하고 寺刹에 寄贈키로 한다.
佛紀二千五百二十三年八月二日陰閏六月十日

復元推進委員會


委員長 金鳳晧
韓國茶人協會長 李德鳳
理事 朴鍾漢
理事 金美熙
理事 朴兌泳
理事 朴東宣
理事 金濟炫
理事 趙昌道

本寺大衆名單

祖室 李西翁
立繩 金智翁
住持 安東星
總務 鄭智牛
敎務 羅夢山
財務 尹在錫
院主 林重和
別座 洪三覺
爐殿 金一先
辛光敏
文炳元
田龍雲
供司 朴貞任
負木 鄭斗植
書記 林文圭

達磨山人 金香巖 謹書

일지암을 복원 하고 낙성식 날에 웬 비가 장대같이 쏟아져서 식전을 현장에서 열지 못하고 아래 대웅보전에서 간소하게 치루었다.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도시 아파트의 한 칸의 공정에도 미치지 못한 예산의 일지암 복원공사지만 여러분의 각고의 노력 끝에 끝났다. 일지암 복원을 끝내고 낙성식을 하기까지 애쓴 다인들의 노고는 먼 훗날에 다시 빛 발할 것임을 예고하면서, 작은 것 같지만 크나큰 업적으로 칭송되어야 한다.

일지암 복원은 우리나라 차문화 발전에 한 획을 긋는 핵(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