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다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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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다인들

해남의 다인들

차문화 발전에 앞장 선 해남다인들

응송(應松) 박 영 희(朴泳熙1892~1990)스님

응송 스님은 고종 29년(1892) 정월 초하룻날 완도읍 죽청리에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익혔다. 스님은 민족주의자인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15세 때 의병에 가담했는데 의병들은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을 거점으로 항쟁, 심적암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고 이 전투에서 의병대장은 전사 직전에 응송 스님에게‘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대흥사 스님들에게 의탁하여 불법을 배우도록 하라.’ 했다.

당시 17세 이던 스님은 대흥사에 몸을 의탁 했다. 대흥사를 이끌어 온 승맥으로 초의선사-범해율사-원응화상-취운화상-응송화상의 순이며 취운스님으로 부터 초의선사의 다도를 이어받았고, 초의선사에 관계되는 여러 유물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일본인의 손에 넘어 간 것을 사들이기도 했다. 응송스님이 아니었더라면 초의선사의 유물이 많은 부분 손실되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청허 휴정선사의 제12대 법손인 응송 스님은 초의선사의 생애를 통하여 사상과 도풍, 다도의 정신을 흠앙했으며 평소에 선다일여(禪茶一如)라는 초의선사의 법어를 즐겨 사용했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중정의 묘미를 차의 생명이라고 가르쳤다. 응송 스님은 99세에 시적(示寂)하셨다.

다음은 ‘파란 차 사랑회원’ 최성림씨가 차문화 부흥을 위해 <일지암을 복원한 차인들의 노력>이란 글에서 발췌한다.

...중략, 일지암을 복원코자 노력한 대표적 인물로 응송 박영희 스님(1892~1990)과 금당 최규용 선생(1903~2002), 우록 김봉호 선생(1923~2003)을 들 수 있다.
응송 스님은 잘 알려진 대로 일제강점기부터 초의 스님의 유품을 수습하고 스님의 비를 세우며 초의 스님의 다법을 이어 전수하려고 애썼다. 응송 스님은 금당 선생과는 달리 초의 스님이 무안 장씨(張氏)이고 출생지가 전남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 신기마을 일 것이라고 추정하셨으며 금당 선생과 우록 선생이 일지암 터를 찾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특히 우록 선생 등이 찾은 일지암 터가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1977년 2월 하순 차인들이 응송 스님을 업고 올라가 함께 터를 확인하기도 했다. 당시 90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산을 오른 응송 스님도 대단하지만 맨 몸으로 올라가기도 힘든 산길을 스님을 업고 올라갔던 차인들의 노고 또한 우리 근대 차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 될 대단한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록(友鹿) 김 봉 호(金鳳皓1924~2003)

우록 선생은, 1924년 2월26일 해남 학동에서 출생, 15세 순천 중학교 때 천도교에 심취, 당시 박석홍 교무관장의 독립정신 앙양 강연을 들으면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비밀결사대 ‘정전회’를 조직하였다가 발각, 퇴학과 동시 옥살이를 1년 6개월간 했다. 그러나 계속 요시찰 인물로서 대흥사로 몸을 피했는데 형무소 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잔병치레가 심했다. 그때 치료약도 없었지만 스님이 달여 주는 차를 마시면서 차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2개월 만에 저도 모르게 병이 나아있었다고 회고 했으며 그때부터 차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해방 후 우록 선생은 서울사대 교육학과를 졸업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 등에서 음악교사로 봉직,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타령>이 당선, 같은 해 월간문학에서 희곡 <찌>가 당선되어 전업 작가의 길에 접어들었고 희곡, 소설, 창극, 번역, 논문 등 30여권의 역작을 펴냈다. 실로 우록은 학문과 예술 분야를 두루 섭렵, 특히 차에 이르면 듣는 이들이 저절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록 선생은 6,25 직후, 고향으로 낙향, 해남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고, 해남신문 발행을 맡았으며 한국문인협회 해남지부와 한국예총 해남지부를 창립했고 차 잡지 <다원>을 발행한 경력이 있다. 선생은 해남의 옛 이름을 딴 새금학당(塞琴學堂)으로 이름 붙여 차와 예절 등의 교육으로 후진양성을 추구했었는데 나중 후배들에게는 ‘새금학당’이 ‘우록학당’으로 불리면서 ‘대둔학회’와 함께 문학과 차의 연계 고리를 만들어 해남의 선비정신을 살리고자 애쓴 흔적이 있다.

註: 새금학당(塞琴學堂) 1997.1.10. 鶴洞 詩竟盦서 창립
매주 월요일 차와 예절, 음악 등 전통문화와 그 시대정신, 사람과 문물을 공부하는 연구 활동 단체

그러나 해남 다인들이 우록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전 예총지부장 용촌 박상대 선생의 글을 인용하여 그 진면목을 알아본다.

....중략, 우록 선생님을 존경하는 더 큰 이유는 그가 고향을 지키고 가꾸었다는 점이다. 선생님의 능력쯤이면 중앙에서도 내가 누구라고 호통 치며 살 수 있었지만 고향을 떠나지 않으시고 초라한 우리들과 함께 해남의 하늘을 이고 살아오심이며 특별히 우리 차에 관한 한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이 고장의 선구자이시다.

다음은 황칠 연구가 정순태씨의 글을 인용한다.

...중략, ‘초의 문화제’를 통해 초의선사가 해남 땅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어떤 고집쟁이 노인네가 홀로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서 열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판소리와 오페라, 서예와 현대미술, 날카로운 정치풍자와 단순히 웃을 수만은 없었던 위트와 해학, 저는 말로만 듣던 천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깊은 예술과 정신문화 세계를 마냥 자유로이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설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이야기로 해남 땅에 흐르고 있는 ‘문화 대공습’ 사건에 대한 전모를 전해 듣지 못했다면 저 역시도 당신의 참 모습을 이야기할 영광조차 누리지 못했을 테지요. ...중략, ‘작년에 행촌이 명원상을 받고 금년에 승설당이 받으셨으니 해남군하고 내가 큰 영광이지요’라며 평생의 벗이자 자신과 함께 차정신과 차문화를 탄생시키기 위해 산고를 함께 치러낸 동지의 영광을 당신의 일 인양, 사슴 같은 해맑은 웃음을 웃으셨습니다.

어느 날, 우록 선생은 응송 스님으로부터 <동다송>과 <다신전>, <초의집> 원본을 빌리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성공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초의선사 유물을 어렵게 구입 한 응송 스님이 꽉 웅켜 쥐고 결코 내놓지 않으려 했던 고집 때문이었다. 우록 선생은 응송 스님을 여러 번 찾아다니면서 어찌어찌 설득하였는지 딱 3일만 보고 돌려준다는 약속을 하고 빌려왔다. 그러나 방대한 양을 3일 동안 다 섭렵할 수 없어서 본문 전체를 사진 복사하였고, 한자로 된 원본이 워낙 방대한 양이라서 혼자 힘으로 안 되니 창강 김두만 선생을 회비를 안 받는 조건을 걸고 회원으로 영입하여 함께 본격적인 번역에 들어갔다. 그런데 창강 김두만 선생은 초의선집이 발간되었을 때 김봉호 · 김두만 공동번역이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기도 했다, 는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했다.

<문학사상> 1975년3월호에 <동다송>과 <다신전> 내용을 소개했을 때는 역주의 내용이 퍽 허술했는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이 나타나서 편집실로 격려와 질문의 편지가 200여 통이나 날아왔었다고 우록 선생은 회고 했다.

이를테면, 죽로(竹爐)라는 것은 어떻게 만드느냐, 일창이기(一槍二旗)는 몇 cm냐?

명심보감에는 차를 아침 공복에는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어쩌면 좋으냐, 는 질문들이 쏟아졌었고, 매일 서너 통의 답신을 써야 했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런 중에 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국학진흥부(國學振興部)에서 <동다송>과 <다신전>의 보완판과 <초의문집>의 영인출판을 권고 받고 큰일을 착수하게 되었노라, 했다.

평생을 차와 함께 살아온 선생은 1999년 제4회 명원차문화상을 2001년 제10회 초의상을 수상하셨다.

행촌(杏村) 김제현(金濟炫 1926~2000)

행촌 김제현 선생은 해남군 문내면 농부의 5남매 중 막내로 출생, 꿈을 안고 상경, 고학으로 당시 국가고시인 변호사 예비시험에 합격하였고, 해방 후 의사 시험에 합격 서울대 부속병원 근무를 시작으로 강진 도립병원장, 해남군립병원장, 광주구호병원장, 여수검역소장 등으로 일하다 41세 때 고향에 제중의원(濟衆醫院) 을 개원 운영하다가 55세(1981년)에 행촌의료법인을 설립하고 해남종합병원을 개원 운영했다. 행촌 선생은 병원장으로서의 활동 외에 서화, 수석수집, 사진촬영, 분재 가꾸기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차에 대하여 높은 식견으로 차문화 보급에 앞장섰다.

‘차와 차의 정신이 그 맥이라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일지암이 있는 차의 본령 해남에서 부터 중흥의 바람이 일어야 한다.’고 역설한 행촌 선생은 일지암 복원을 위하여 무던히 애쓴 흔적이 남아있다. 더불어서 해남 연동의 윤형식 회원 소유 밭 700평을 무상으로 대여 받아 차밭을 만들어 ‘다인회 다원’으로 하여 직접 차를 키우고 따고, 만들고, 마시는 체험을 통하여 茶道를 몸에 익히게 했으며 사재를 희사하여 녹야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인회 사무실을 개설했고 그 방에 다구와 다기일체를 마련하였으며 영상교육물과 <한국차문화사>, <초의전집>, <현대 생활 차 쉽게 마시는 법> 등의 책자를 발간했다.

....중략, 행촌 김원장이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해남종합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내가 못 다한 차문화 사업을 계속 해 달라.’는 말 뿐이었다.

....중략, 일지암이 있는 고장 해남, 이곳에 우록 선생이 차의 철학과 실체를 함께 하시는 지역 원로로 계시고 그분의 금란지우인 행촌 김제현 선생이 함께 하여 우리 고장 차계에 끼친 영향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늘이 깊고 넓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윗글은 해남 다인회장 윤두현 선생의 회고 글과 해남 예총회장 용촌 박상대 선생의 글이다. 다음은 김동섭 해남종합병원 이사장의 부친에 대한 회고 글을 싣는다.

...중략, 명맥을 이어가는 차문화 보급을 위해 해남다인회와 초의문화제를 창립하시던 모습, 불교계가 권력과 정권에 유린되는 것을 막고자 대흥사 부도전의 조사님들 앞에 홀연 단신 석고대죄 하시던 모습, 국민훈장 동백상 수상 시 의연하시던 모습 등은 자식인 나로 하여금 아버님의 가치와 사고의 절대적 지주로서 부동의 존재이셨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중략, 한때 방황하던 나를 불러 아버님이 손수 팽주가 되어 차를 내시면서 석잔 째까지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넉 잔째를 마시면서 ‘차를 가까이 해라. 그러면 중정을 얻을 수 있다.’하신 말씀이 승가의 선문답인 듯 아직도 나는 그 숙제를 풀고 있다.

행촌선생의 일생은 해남다인회 발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1979년 해남다인회 창립 때부터 작고하실 때까지 회장을 맡아오셨고 19992년 시작한 초의문화제 역시 별세하실 때까지 집행위원장을 맡아서 훌륭한 족적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행촌 선생은 마지막 유언으로 차문화 보급을 당부할 만큼 해남 다인회의 주춧돌 역할을 담당했음은 물론이고, 1979년 한국차인회가 창립될 때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의 고문으로서 타계 직전까지, 20여년을 한결같이 차 문화 중흥에 앞장섰음을 모두는 기억하고 있다.

국민훈장 동백장과 명원차문화상, 초의상을 수상하기도 한 행촌 선생은 차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 후대의 다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승설당(勝雪堂) 이순희(李順姬1934~ )

승설당 이순희 선생은 우록 선생, 행촌 선생, 정암 선생과 함께 한국차인회 창립회원으로서 한국의 차 문화에 기여한 공로가 대단할 뿐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해남 차문화의 대모 격이다. 선생은 해남여성다인회인 자우다회(紫芋茶會) 회장, 1987년 광주 지역 다인 연합회 부회장, 1988년에 규방차회를 창립, 한국차인연합회 이사에 이어 부회장 역임, 1992년 초의문화제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1994년 한국다도대학원 다도교수, 2001년 한국다도대학원 총동창회장을 했다. 또한 1990년 워싱턴 문화교육원개원 다도교육 및 뉴저지 다도교육, 1992년 시카고 한인교회 다도교육, 1994년 프랑스 파리 해남여성 다인 다도의 밤 개최, 1996년 일본 국제 차 심포지움에 참가해 행다 시연을 비롯 각 급 학교의 초청으로 다도예절교육을 실시했다. 1989년에는 한국말차연구회 고세연 회장, 다화원 김태연 원장과 공동으로 ‘한국현대 말차발표회’를 서울 라마다르네상스에서 열어 말차의 부흥을 일으키는데 효시자의 역할로 한몫해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선생의 차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함을 인정받아 1997년 명원차문화상, 1999년 한국차인연합회 창립 20주년 공로상, 2002년 제11회 초의상을 수상하였다.

명원차문화상은 1979년 한국차인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일지암복원사업 추진위원이었던 김미희여사가 1980년 창립한 명원다인회에서 1996년부터 시상한 상으로서 제1회가 행촌 선생이, 제2회 승설당, 제4회를 우록 선생이 차지하여 해남다인들이 명원차문화상을 다 가지고 간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선생은 1979년부터 숙당 배정례 화백으로부터 <미인도>를 공부하여 1989년 한국서화작가협회 예술 대전에서 특선, 1992년 대한민국예술대전에서 문화예술상을, 1994년 서화작가협회 초대작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선생은 다인답게 그의 작품에서도 미인도와 함께 다화(茶畵)를 주로 그렸다.
다음은 <茶人>지에 실린 글을 발췌해서 다시 싣는다.

...중략, 창립일 인사말에서 ‘우리 민족이 즐겨 마신 차를 부흥시키는 것이 사라진 민족문화를 살리는 일’이라고 했던 박동선 고문의 한마디가 차생활의 좌우명이 되고 있다고, 이순희 회장은 말한다. ‘해남은 시골이어도 문화촌이어라. 차에 미처버렸제. 차에 미치지 않고 누가 그렇게 했간디. 우록 선생과 행촌 선생 등과 수석을 하다가 차를 마시게 되었고 그라다 교양을 높이기 위하여 그림을 시작한 것이 미인도로 인정을 받게되어부렀어.’

승설당은 차에 미친 3인방 중에 두 분 다인을 멀리 보내고 온통 차도구와 찻그릇과 문방사우가 단아하게 놓인 한옥 방에 獨居止觀 하면서 오늘도 한국의 차문화 발전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다.

이렇듯 초의선사가 남기고 간 ‘茶禪一如’의 횃불을 들었던 茶人들의 행보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오늘날 다문화의 꽃을 피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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