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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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

초의선사

차의 중흥조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

초의선사는 서산대사와의 연장선상에서 선과 교를 함께, 전통과 실학을 전승했으며 경전과 선만을 강의하는 율사나 강백이 아니고 시와 그림과 글씨, 차와 선을 다 겸비한 스님으로서 유학 선비, 학자들과 교우관계로 인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선승이었다. 특히 초의선사로 하여금 한국 불교문화를 꽃 피울 수 있게 한 것은 禪의 전통 사상을 전승한 초의선사가 실학사상과 유교(儒敎)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와의 각별한 관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초의선사는 교(敎)와 선(禪)과 실학(實學)을 중시하면서도 시, 서, 화, 탱화, 단청, 범패에 능했고 손수 차를 덖어 마시며 <동다송>과 <다신전>, <다시>를 쓴 다성(茶聖)으로 칭송되면서 불교문화의 꽃을 피운 것이다.
초의선사가 살고 간 그 시대는 조선의 격동기에 이르기 직전까지의 시대로서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의 다섯 왕이 교체되었고 여러 석학들과 시문으로 교류하며 마음을 활짝 열고 트인 생활을 했으니 자연 그 흐름에 따라 직접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받으며 한 시대를 살았다고 봐야한다.
초의선사는 세상에 숨어 살고 있는 듯 하면서도 결코 숨어 살지 않았다.

초의선사 출생

초의선사의 속성은 장(張)씨, 흥성(興城)이 본이며 흥성 장씨 18世 후손으로 1786년 4월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출생한다.
초의선사의 출생을 말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생전에 어머니가 꾼 태몽 얘기를 자주 했었던 듯, 특별한 태몽이 전해진다.
해남 우수영에서 수사(水使)로 있을 때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신헌(申櫶)은 초의선사 입적 후, <사호보제존자초의대종사의순탑비명(賜號普濟尊者艸衣大宗師意恂塔碑銘)>에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어머니가 초의를 잉태하였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세상을 밝혀주는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시이며 큰 인물의 출생 시에 의례히 따라 붙는 태몽으로서 특별함이 내포되어 있는 꿈이라할 수 있다. 또한‘부처님 탄생 4월8일보다 사흘 차이가 나는 4월5일 출생인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 쓴 것을 보면 신헌은 스님으로서의 초의선사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후, 이희풍이 찬술한 <초의대사탑명(草衣大師塔銘)>, 범해각안의 <초의선백전(草衣禪伯傳)>, 유경도인이 저술한 <초의대선사운(草衣大禪師韻)>, 진도 사람 우당이 쓴 <대흥사초암서(大芚寺艸庵序)>, 허유의 <몽연록(夢緣錄)>,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 등에 쓰여 졌다.
그렇다면 초의선사의 출생지 무안군 삼향면은 어디인가.
그것은 첫 출가지 운흥사(雲興寺)와 함께 당연히 조명해야 한다. 초의선사의 출생지를 찾기 위하여 앞장섰던 이는 초의선사의 차 풍을 이어 받은 종법손 응송 박영희(應松 朴映熙.1990년 작고)스님이었다.
당시 대흥사에 머물고 있던 응송스님은 1985년 7월 초의선사의 출생지를 찾아야 한다는 초의선사 추종자들과 함께 직접 나섰다. 먼저 무안군 삼향면이라는 기록과 신헌(申櫶)의 초의대종사탑비명(草衣大宗師塔碑銘)에 의하여 ‘5세 때 강에서 놀다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건져 준 사람이 있었고’ 라는 기록을 토대로, 무안군 삼향면 일대에서 큰 개천이나 저수지를 찾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초의선사의 <고향에 돌아와서>라고 제목 붙인 싯귀 중 신기(新基)라는 지명을 근거로 했다.

[歸故鄕 고향에 돌아와서]

遠別鄕關四十秋 歸來不覺雪盈頭
新基艸沒家安在 古墓苔荒履跡愁
心死恨從何處起 血乾淚亦不能流
孤笻更欲隨雲去 己矣人生愧首邱

고향 떠난 지 어느새 40년이 지났네
머리에 흰 눈 쌓인 후, 고향을 다시 찾으니
신기마을에 잡초 우거져 살던 집 어디더냐
옛무덤에 이끼 끼어 걸음마다 시름이로다
마음을 잃었는데 한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피는 말라붙고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 따라 떠나노니
아서라 수구(首邱)라는 말 부끄럽구나

초의선사는 출가 후 40여년 만에 나이, 머리가 하얗게 센 줄도 모르고 떠돌다가 고향을 찾았다. 했지만 살던 집은 잡초 우거져 집이 어디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옛 선영의 무덤을 돌아보면서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고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시름이 켜켜로 묻어 올라오는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여우가 죽을 때 고향으로 머리를 둔다는 말조차 그 자신에게는 부끄럽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미 출가한 몸, 고향을 돌아보는 것일 뿐 그 자신 고향에 와서 묻혀야 할 무엇도 없음을 한탄하며 구름 따라 다시 떠나야만 하는 신세를 쓸쓸해하는 시로써 이 시에 ‘新基艸沒家安在’라는 구절이 있다.
‘신기마을 살던 집은 잡초만 우거져 있을 뿐 그 자신이 살던 집은 흔적도 없다.’는 한탄이다. 여기서 신기(新基)라는 지명을 들어 그의 출생지가 신기가 아닐까, 하는 한 가닥 가능성을 품을 수 있다. 실제 막연하기는 했지만 5만분의 1 지도 속에 삼향면 임성리에 신기라는 지명이 있고 신기마을에 큰 개천이 있으며 뒤편에 위치한 뒷골에는 옛 절터와 중샘이라 불린 연못이 있었다.
신기 주위에는 임성리 북쪽으로 지적산(芝積山:188m), 동쪽으로 전봉산(傳峰山)과 오룡산(五龍山):225m), 남쪽으로 부주산(浮珠山:140m)이 둘러싸여 있어 신기마을은 서쪽으로 신기저수지를, 동쪽으로 과동저수지를 끼고 마을 앞으로 크고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때문에 일제시대 저수지가 생겼고 초의가 태어난 200여 년 전 크나큰 개천이었음이 분명하다며 응송스님은 그 부근 신기마을이 초의의 출생지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 한편으로는 금당 최규용(錦堂 崔圭用)이 펴낸 [금당차화(錦堂茶話) 1978년 4월 발행]에서는 초의 출생지를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로 추정하면서 흥성장씨(興城張氏)의 후손으로부터 왕산리 동쪽 산 아래 샛골(한문으로 新基)에 흥성 장씨 선영 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추정해 봤다고 적고 있다.
어떻든 위에 예시한 시에서 신기(新基)라는 마을은 왕산리에도 임성리에도 있는 것으로 봐서 어느 쪽이던 신기 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분명하다.
몇 년 전 무안군에서는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가 생가임을 발표했고 초의선사 생가를 왕산리에 대대적으로 복원하기 시작했다. 무안군 삼향면 국도 근처에 지금도 큰 저수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부근 어디쯤에 초의선사 생가가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초의선사 출가

운흥사벽봉

신헌의 <탑비명>에 의하면 초의선사 5세 때 물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구해 주었다. 초의선사를 구해준 이가 스님이었을 수도,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누군가의 구원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가정한다면 나중, 초의선사는 부처님께 보은하고 살아야하는 운명이었음을 암시하게 되는 것이다. 초의선사는 15세(1800년)에 발심이 일어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드는 출가(出家)의 서원(誓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필연이라 보아진다.
불문에 들기를 마음속에 깊이 맹세한 초의선사는 전남 나주군 다도면 덕룡산(德龍山) 운흥사(雲興寺)에서 대덕(大德) 벽봉민성(碧峰敏性)스님에게 의지 삭발염의(削髮染衣), 머리를 깎고 잿빛으로 물들인 가사(袈裟)를 입었다.

운흥사는 고려 말 창건되었으나 6.25 때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운흥사 절터만 남아 있다. 덕룡산을 주봉으로 불 타 없어진 대웅전 터는 가시덤불에 쌓인 채 6개의 큼직한 당간지주가 버티고 있고 당간지주 아래는 좌, 우 골짜기에서 내려와 물이 합치는 두물머리가 있다. 그리고 대웅전 터 뒤로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 비자나무, 산호수 등 빽빽한 수종 사이에 차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초의선사는 차나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운흥사로 출가한 것이 원인이 되었던지 불문에 들자 곧 차와 깊은 연을 갖게 되어 차를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훗날 차의 선인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됨직하다.
예전 절집에서는 차나무에서 찻잎을 따는 것부터 시작하여 봉지에 넣어 보관 할 때까지 자잘부레한 모든 손질이 다 행자의 몫이었다. 때문에 출가한 행자들이 맨 처음 겪어야 하는 수행의 일종이었다. 그 수행으로 거둔 차는 거개가 양반네들에게 상납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차 생활이 성행했던 고려 때는 권력을 쥔 자들과 선비들의 차 마시기로 말미암아 차 재배를 하여 생산하는 농민들은 혹사당했다. 차 농사를 지어 모두 상납을 하고 나면 그들은 먹고 살 곡식이 없어 거렁뱅이질을 하고 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때문에 차 농사를 하는 서민들에겐 그깟 배도 안 불러오는 차를 마시는 양반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생각엔 차나무는 그저 담배나 술처럼 배부른 자들의 기호식품에 불과한 것이었다. 고려조 이규보의 시에 서민들의 이런 실상이 잘 나타나있다.

관에서는 노인과 어린이까지 징발하여
험준한 산골짜기에서 간신히 따 모은 차잎을
머나먼 한양으로 등짐져 나른다네
이는 백성의 애끓는 피와 땀이리니
...중략,
차밭 모두 불살라 차의 공납 금하면
남녘 백성들 편히 쉬는 것
이제부터 시작되리니

당시는 탐관오리들이 즐기는 기호품에 불과한 그 차나무 때문에 백성들은 시달렸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 병폐는 조선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가 망하고 동시 승려 계급이 무너지면서 차 밭을 불 지르거나 파서 없애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사찰 주위에서 차나무가 자랐으며 스님들이 그것을 지키며 차 마시기의 맥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초의선사가 맨 처음 차를 알게 되는 동기는 운흥사의 벽봉 밑으로 출가하여 선(禪)과 교(敎)를 행하기 이전 행자 시절 차 만들기부터 익히게 되어, 점차 차(茶)로부터 맛과 향과 멋을 알기 시작하면서 차를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월출산 신갑사 월명

스님은 바랑 짊어지고 어디론가 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늘 떠남’, 그것은 모든 스님의 수행이며 고행이며 평화이다. 문득 어느 곳으로 떠나 어느 곳에서나 깨우침을 얻으면 그것이 곧 부처의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초의선사는 19세(1804년) 되던 해 어느 날 영암으로 길을 잡는다. 길 따라 걷는 중에 그의 앞을 턱 가로막는 웅장하고도 수려한 월출산(月出山)을 만난다. 그 대목이 신헌의 <초의대종사 탑비명>에 기록되어 있다.

약관(弱冠) 시절에는 월출산을 지나다가 그 산새가 기이하고 아름다움에 빠져 저도 모르게 그 산등성이에 올라 바라보니 마침 바다에서 떠오른 달이 황홀하여 마침 고노(杲老)가 훈훈한 바람을 만난 듯 가슴에 맺혔던 것이 말끔히 가셨다고 하더라. 그 후부터는 가는 곳마다 별 꺼리길 것이 없었다 하니 이는 전생부터 익혀 온 기질인가 부다.

주)고노(杲老);송나라 때의 고승.

초의선사는 마치 조각한 듯 많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월출 산세의 특별함에 빠져 저도 모르게 산등성이에 올라 먼 바다를 향해 앉는다. 마음에 별 생각 없이 한 곳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마침 땅거미 깔려 어스름한데 바다 가운데에서 달이 떠오르고 있다. 그는 수평선 저만큼 바다 속에서 시나브로 떠오르는 달의 자태가 너무나 황홀하여 넋을 잃고 바라보던 중 뜻밖의 바람 한 점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한기를 느낀다.
아! 그는 절로 탄성을 뱉으며 문득 깨우침과 함께 스스로 마음이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개오(開悟)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달은 공(空)인데 달은 꽉 차(滿) 있는도다.’
속세와 인연을 끊은 지 4년여 후, 조석으로 벽봉(碧峰)스님으로부터 선(禪)과 교(敎)를 가르침 받아 한 발 한 발 깨우침의 세계로 가고 있었지만 그 날 월출산 등성이에서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다가 떠오르는 달의 자태에 빠져 스스로 자연의 가르침에 머리 숙이면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고 저절로 생겨나는 지혜, 자연지(自然智)를 맛보게 된 것이다.
‘지면 다시 무엇으로 온다는 것’, 그것은 차륜(車輪)의 회전이 그지없는 것처럼 중생이 삼계육도의 미혹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 한다는 불교의 윤회설과 맛 물려 벽봉스님에게 듣던 선(禪)과 교(敎)를 몸소 육감으로 깨우치면서 절실하게 그의 뇌리에 박혔을 것이다.
초의선사는 월출산의 달로부터 깨우침을 받은 것은 ‘마치 고노(杲老)가 훈훈한 바람을 만난 듯 가슴에 맺힌 것이 말끔히 가시는 듯 했다’고 자신의 깨우친 마음, 또는 해탈의 경지를 선 지식인들에게 고백했었다. 이것은 훗날 초의선사의 시에 달을 노래한 싯귀가 많은 것을 봐서도 그 순간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의 황홀함에 취했을 선사의 모습을 어림짐작해 볼만하다.

[松月 소나무와 달]

창밖에 한들거리는 소나무
곱디고운 소나무 위의 달
한 쪽은 맑은 소리 그리도 그윽하고
한 쪽은 고운 달빛 어찌 그리 청정한가
솔의 정결함과 달의 화사함이 서로 어울리고
그 운치와 절조가 모두 기이하도다

끝내 찬 빛으로 솔나무 비추더니
서재에 스며들어 책갈피를 비추는도다
맑고 교교한 달빛 몸에 스미고
서늘한 바람은 뼛속까지 씻어 내린다
마침내 구름이 달을 가려 밤새 즐길 수 없다
어찌 밤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둥근 모습 산 너머로 감추고
그림자 가늘게 늘어지고 쓸쓸하게 멀어지도다
처량하도다 처량하도다
가까이 들으니 달도 목메어 우는도다
...중략,

이 시는 제목에서 말하듯 소나무에 걸린 달을 노래한 것이다. 소나무는 그윽한 운치와 함께 곧고 푸른 절개를 품고 있는데 그 소나무에 걸린 달의 맑고 청결함이 어울려 잠 못 이루는 산사의 밤을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시이다.
구름에 가려 달빛이 사라졌을 때 초의선사는 깊은 번뇌에 싸여 삶의 기폭을 체험하게 되며 상실감에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달빛의 사라짐은 순간적 이별일 뿐 구름 걷히고 새벽이슬 내리면 말갛게 씻긴 자태는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고 노래한다. 초의선사는 어느 듯 달그림자 가시고 희붐하게 열리는 새벽을 맞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끝내는 무엇도 채움이 없이 텅 빈 듯 멀리 있는 달과 자신을 비교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달과 자신은 닮았다고 말하면서 영원히 변치 않을 친구라고 말한다.

초의선사의 법호 내력

초의선사의 자(字)는 중부(中孚)인데 주역 풍택중부괘(風澤 中孚掛)에서 가져 온 것으로 주역을 했던 누군가가 붙여준 이름인 듯하다.
‘중부는 부드러움이 안에 있고 강함이 가운데를 차지했으므로 기뻐하고 공손해서 미더우니 이에 나라를 교화할 것이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 초의선사의 운명을 확연히 예언하고 있음이다.
또한 초의선사의 법명 의순(意恂)은 운흥사벽봉이 내린 법명인 터, ‘뜻이 진실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초의선사는 당시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이름 난 완호법사(玩虎法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는다. 구족계는 건당(建幢) 즉, 법당을 세운다는 뜻으로 행해(行解)가 높아서 다른 이의 사표가 될 만하면 법맥을 이어도 좋다는 허락인 것이다. 이때 완호법사는 초의(艸衣)라는 법호도 내렸던 바, 완호스님은 호의(縞衣:명주옷), 하의(荷衣:연옷)라는 수제자가 있는데 초의(艸衣:풀옷)까지 해서 삼의(三衣)인 것이다.
초의라는 법호의 내력을 여러 기록을 찾아 더듬어 본다.
첫째, 고려 야운선사(野雲禪師)의 자경문(自警文)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가 있다.

菜根木果慰飢腸 松落艸衣遮色身 나무뿌리와 나무과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솔잎과 풀 옷으로 벌거숭이 알몸을 가린다

여기서 ‘艸衣’는 풀 옷이라는 뜻이다.
‘풀 옷을 입는다’
기막힌 법호다. 더군다나 무엇도 없이 절집에 앉아 경전을 읽고 시를 짓고 차를 우리는 스님에게 정히 어울리는 법호 아니겠는가.
둘째, 중국의 사략(史略)에서 땄을 것이란 견해다.

宀居陶居構木爲椔 食木實衣艸衣

움집을 만들어 나무 열매를 엮어 매어 보금자리로 삼고
나무열매를 따 먹고 풀 옷을 입고 살아도 즐겁다네

여기서도 풀 옷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셋째, 신헌(申櫶)의 <초의대종사탑비명>의 기록을 토대로 본다.

草衣其拈花之號也 초의는 그 염화의 이름이다

넷째, 김명배(金明培)의 초의선집에 의하면,
당나라의 용아화상(龍牙和尙)은 용아산(龍牙山)에서 푸른 산과 물을 벗 삼아 살며 풀 옷을 입었다는 글귀가 있다. 초의선사의 글에도 ‘과일을 먹고 풀옷차림이어도 마음은 달처럼 밝다. 한평생 무념(無念) 무애(無涯)하지 않고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초록빛 산이 내 집이지요’ 했다고 적혀있다.
이렇듯 여러 설을 종합해 보았지만 결국 초의라는 호는 ‘풀 옷을 입고 검소하게 사는 선승의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초의(艸衣) 외에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초사(艸師),병석(甁錫), 선송(禪誦), 병발(甁鉢), 선황(禪況), 해옹(海翁), 해양후학(海陽後學), 우사(芋社), 자우(紫芋) 등의 호가 더 있다.

완호스님은 초의선사의 다재다능에 대해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크게 꾸짖지도, 크게 칭찬도 없었지만 깊은 관심으로 지켜보았음을 알 수 있다.
초의선사 26세 되던 해에 완호스님은 천불전을 복원하는데 앞장서서 천불전 불사를 진두지휘 하면서 예의 호의와 하의에게는 천불전 조성을 위해 여러 곳으로 시찰 보냈지만 초의선사는 함께 보내지 않는다. 초의는 그때 완호 스님에게 잠깐 서운한 마음을 품었었다. 그렇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완호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천불전의 완공을 눈앞에 두고 완호 스님은 경학이나 선교에 밝은 스님들을 두고 젊은 수좌 초의에게 <천불전 상량문>을 쓰라고 말한다. 초의는 깜짝 놀란다.
초의선사는 합장한 채 말을 잇지 못했을 터다. 그러나 완호스님은 오래 전부터 초의선사의 특별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상량문을 쓰라고 하면서 곁들여 단청까지 맡겼다. 그것은 완호스님은 내색하지 않았더라도 초의선사가 이미 큰 그릇임을 알고 있었다. 약관 20대 후반의 초의선사가 쓴 최초의 <천불전 상량문>은 당대에서는 물론 후대에까지 명문으로 이름이 났다.

[천불전 상량문]

대체로,
지극히 참다운 것은 허적(虛寂)해서
그 이치가 색상(色相)의 첫 머리에서 다하고
묘도(妙道)는 충미(冲微)하여
그 정이 명언(名言) 밖으로 나타나느니라
....중략
이제 비록,
법신(法身)은 쓸쓸하다 할지라도 느낌에 따라 통하며
물기(物器)는 좋다할지라도 헤아리지 못하면 막히나니
이로써 본받고 다듬으며
저녁에는 반성하고 아침에는 부지런하여
어찌하면 구제할 수 있을지를 발원하도다
이 두륜(頭輪)은 천고의 명람(名籃)이요 나라의 승찰이라
영호만리(瀛壺萬里)를 안아
금사(金沙)에서 바다 멀리 선인을 맞이하고
구름 낀 산맥이 둘러있어서
선방에 속인을 들지못하게 하느니라
......중략
완호스님은
사찰 안의 어른이요, 법문의 스승인데
깊은 뜻을 깨닫고 널리 그 생각한 바를 펴서
좋은 인연을 천하에서 뽑아
극락의 공을 도솔천으로 돌아가게 하여
바라던 일을 삼년 만에 이루어
지장전이 용화전과 마주하게 하였도다
여기서 그때를 살펴보자면
햇머리는 작악(作噩)이요
날은 경인(庚寅)이요
시는 신묘(辛卯)라
입주상량(立柱上樑) 하니
범이 꿇어앉았고 용이 뛰는 형용이더라
서까래에 단청하고, 도리에 새긴 무늬
나는 난조 같고 학이 춤추는 것 같도다
우거진 숲과 대나무는 너울너울 춤추고
제비와 꾀꼬리는 맑은 노래로 한화하며
좋은 술로 잔치 베풀어
흥겨운 시(詩)를 읊도다. ...중략

일지암(一枝庵) 결암

표충사를 지나 대광명전의 돌담을 끼고 가파른 산길을 따라 1,700m 가량 올라가면 두륜산 중턱 울창한 숲속에 문득 단아한 암자 한 채 앉아있다. 일지암(一枝庵)이다.
초의선사는 39세(1824년)에 두륜산 정수리에 한 칸의 띠집을 짓는다. 그런 다음 한산자(寒山: 중국 당대의 대사)스님의 시에서 일지(一枝)를 취해 일지암(一枝菴)이라 이름 붙인다.

想念鷦鶁鳥安身在一枝

뱁새는 항상 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만 있어도 편하다.

초의선사는 운흥사 주변의 차나무 군락에서 씨를 받아 일지암 주변에 차 나무 씨를 뿌린다. 일지암 뒤편으로 돌 틈에서 나오는 샘을 만들고 유천(乳泉)이라 이름 붙이고, 연못을 팠으며 사철 피는 꽃씨를 뿌렸다. 초의선사는 작은 암자 일지암에서 차를 우리고 선을 하며 경을 읽고 시, 서, 화를 했다.
초의선사가 거처하던 일지암에 대하여 한폭의 풍경화처럼 묘사한 글이 있는데, 그의 제자 소치(小癡) 허유(許維)의 몽연록(夢緣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지암은 산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자와 달리 그 구조가 특별했습니다. 주춧돌은 모양이 일정치 않은 잡석이며 기둥은 소나무의 외피만 벗긴 채 다듬지 않았습니다. 서까래는 차양이 없고 울퉁불퉁한 평고대가 받치고 있습니다. 추녀는 반듯하게 뻗어 있었는데 자아올리지 않았고 지붕은 볏짚이었습니다. 언뜻 보아 짓다만 암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변 경관은 천하일색이었습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대나무 무성한 곳에 두어칸 초가를 얽어 그 속에서 살았습니다. 솔가지는 처마를 스치고 초가 흙집 주위에는 노란 산국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작은 꽃들은 뜰에 가득하여 함께 어울리면서 들 복판에 판 연못 속에 비춰 아롱거렸습니다.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다(茶)절구를 마련해 두고 있었습니다. 초의선사의 시에도 일지암을 묘사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鑿沼明涵空界月
連竽遙取經雲泉

연못을 파니 허공의 달이 환하게 담그어지고
낚시대 던지니 구름 샘까지 통하는도다.


碍眼花枝剗却了
好山多在夕陽天

눈을 가리는 꽃가지를 꺾어 버리니
석양 하늘가에 아름다운 산이 맑기도 하구나.

나는 그 초암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배우며 시를 읊고 경을 읽으니 참으로 적당한 거처를 얻은 셈이었습니다.
소치의 기록을 보면 초의선사의 일지암 정경이 눈에 선하다.
다음의 시는 벗인 듯싶은 금령이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지은 후 찾아갔다가 지은 시이다. 금령의 시를 읽으면 일지암의 정경과 초의선사의 사상을 보다 상세히 접할 수 있다.

[- 錦舲詩 금령의 시]

禪因緣結墨因緣 架翠空濛屋聚椽
卓錫先於飛鶴響 尋香從自下流泉
手栽定出三花樹 身淨長依九品蓮
覓句有時參色相 山茶紅發雪中天

불도의 인연으로 글의 인연 맺은지라
산 속 높은 곳에 지은 집을 찾아
나르는 학보다 내 주장자가 먼저
아래쪽 개울로부터 향내 찾아 올라왔네
초의는 손수 삼화수(三花樹:註)심었고
깨끗한 몸으로 구품련(九品蓮:註)에 앉았구려
시 한 수 지으려고 두루 살필 때
눈 속에 산다화 붉게 피었네

주)
*삼화수((三花樹):봄, 여름, 가을 세 계절에 피는 꽃
*구품련(九品蓮):정토에 왕생하는 중이 앉은 9종의 연화대

그렇다면 정작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초의선사의 시로 일지암의 정경을 그려본다.

[重成 一枝庵 일지암 다시 짓다]

烟霞難沒舊因緣 甁鉢居然屋數椽
鑿沼明涵空界月 連竿遙取白雲泉
新添香譜搜靈藥 時接圓機展妙蓮
礙眼花枝剗却了 好山仍在夕陽天

짙은 안개 덮여도 옛 인연 끊을 수 없으니
중 살림 할 만큼 편안한 몇 칸 집을 지었네
연못을 파서 밝은 달 비추이게 하고
대나무 통 이어 멀리 백운천 취했나니
다시 향보를 다듬으며 영약을 캤고
때로는 원기(圓機:註)를 접하고 묘련(妙蓮:註)을 펼치네
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말끔히 잘라내니
멋진 산이 노을빛에 훤히 드러나는구나

주)
*원기(圓機):기류, 기근, 기연이라는 숙어로 쓰이는데 종교의 대상인 교법에 대한 중생을 통털어 기(機)라 하며 원기는 원만한 교법이라는 뜻이다.
*묘련(妙蓮):부처님 일대의 설교 전체를 말한다.

윗 시 <일지암을 다시 짓고>는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처음 조성하고 5년쯤 후에 다시 보수하고 단장했을 때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봐서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자신의 말년 거처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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