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녹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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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녹청자

해남 녹청자

해남 녹청자에 대하여

해남지역 청자의 개념 및 성격

전라도 지역의 도자문화는 한국도자기사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라 할 수 있다.

특히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일대에서 형성된 녹청자로 대표되는 청자는 생산지로서의 중요성 뿐만 아니라 화원면 신덕리 일대는 초기청자의 발생지로서도 중요한 문화적 유적지였음이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따. 해남 녹청자의 특성을 지리적으로 볼 때 산이면은 화원반도와 영암 삼호반도가 양쪽으로 옹위하고 있는 가운데 고대로부터 바다 건너 중국과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할 수 있는 통로의 역할과 영산강 유역 문화의 형성은 물론 청자문화와 함께 당시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 문화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시기적으로 볼 때 마한, 백제를 거쳐 통일신라에 이르러 발달된 것으로 보이는 영암 토기 요지군의 축적된 제작 기술이 어떤 계기로 인해서 해남 녹청자 도요지에서 혁명적인 자기문화로 발달되고 그 이후 나타나는 찬연한 청자 문화에도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되며 조선의 분청자와 백자, 그리고 생활용기인 옹기에까지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녹청자의 제작상의 특성으로 녹청자의 태토는 사질입자가 많은 조점토를 수비•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청자와 쉽게 구별할 수 있으며 녹청자의 유약은 청자와 같이 패석회를 매용제로 한 칼슘유약을 사용하고 있으나 청자 유층보다 아주 엷게 시유되어 있으면서도 산화염 또는 반 환원염 번조라는 통념과는 달리 환원염으로 번조하였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아쉽게도 한국 도자사에 있어서 녹청자의 존재는 강진 청자에 묻혀서 특별히 연구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고려청자의 변용 또는 아류로 인식되어있다. 그러나 녹청자는 분명히 한국도자사의 한 유형으로서 독자적인 발전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녹청자를 정확히 체계화하지 않고는 한국도자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강진의 청자만을 위주로 연구되었던 측면에서 앞으로는 해남 녹청자와 함께 바람직한 방향으로 연구되어지기를 바라며, 독특한 해남 녹청자의 특징적 존재가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위하여 앞으로 해남 산이면과 해남 녹청자에 관심이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4대를 잇는 해남 녹청자의 [화원요]

해남 녹청자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지 않고 재조명된 것은 녹청자재현에 일생을 바친 정형식(95년 타계)옹에 의해서이다.

화원 정형식 선생의 부친인 정동윤(63년 타계)옹은 처음에 전남 장흥군 용산면에서 현대도요(옹기)를 해오다가 70여 년 전 녹청자 재현에 관심을 갖고 녹청자 도요지 인근의 입지 조건이 좋은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에 터를 잡은 후 실패를 되풀이하다가 끝내 녹청자 재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했다. 그 후, 장남인 화원 정형식 옹은 두 동생 정광식(2007년 타계), 정광옥과 함께 부친이 이루지 못한 녹청자의 재현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재현에 성공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실용화 시킬 준비 중에 타계했다.

그 후 화원의 장남인 남강 정기봉 씨가 부친으로부터 녹청자 및 도예기법을 전수 받으면서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하여 지금은 부친의 호 화원을 따서 [화원요]라는 이름을 붙이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남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의 [화원요]는 녹청자의 신비를 재현한 현장이다.

남강은 2012년 전라남도 공예명장(전남1호)에 선정되었으며, 이 후 2015년에는 해남향토무형문화유산(제34호)에 지정된 굴지의 작가이다. 그는 1998년에 전국 공예품 대전에 녹청자 반상기 세트를 출품하여 국무총리 상을 수상하였고 2000년에는 전국 관광 기념품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하고 녹청자 장고 소품이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한국관광명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강은 대한민국청자공모전과 전라남도미술대전에서 각각 대상을 받았으며, 그외에도 전통공예대전, 현대도예공모전 등 국내외 각종 공모전 및 전시회에 참가하여 해남 녹청자의 진가와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으며 특히 녹청자다기류를 개발하고 보급하여 국내외 다인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해남 녹청자의 재현 및 실용화는 고향 정동윤 옹으로부터 화원 정형식 옹에 이어 남강 정기봉에서 다시 남강의 외아들인 정병민(중국경덕진도자대학 대학원 재학)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다음은 정기봉의 학위논문 ‹해남 녹청자의 특성 분석 및 재현에 관한 연구›에서 발췌하여 싣는다.

녹청자란 조점토(粗粘土)로 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엷은 칼슘 유약을 칠한 다음 갑발(匣鉢)에 넣어 원통등요에서 고온의 환원염으로 번조한 자기를 말한다.
해남 지역 청자에 대한 관심은 1983년 산이면 진산리 일대의 청자가마터가 알려지면서부터이다.
특히 완도 어두리 해저에서 출토된 다량의 청자 제작지가 산이면 청자 가마터로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 화원면 신덕리 일대를 중심으로 초기 청자가마터가 조사되어 해남 청자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화원 지역 청자의 경우 한반도 자기 발생 시기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매우 중요한 가마터이다. 또한 이들은 많은 수의 가마가 동시에 운영된 대단위 가마터로 초기 청자의 양상과 조질, 청자의 변천을 파악하는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유적이다.
해남에서 기존에 조사된 청자 가마터는 산이면과 화원면 일대에서 160여기가 조사되었다. 이는 강진 대구면 일대의 청자가마터에 버금가는 대규모 집단 가마로 한국 도자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다. 해남 지역에 이처럼 많은 가마가 자기발생 초기부터 운영되고 독창적인 도자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용이한 원료 수급과 바닷길을 이용한 공급의 유리함도 있으나 무엇보다 이를 수용할 수 있었던 우수한 문화와 지방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들 도자제작 집단과 해남 청자의 성격을 명확히 밝힐 수 있다면 한반도 자기 발생 시기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해남 청자의 연구는 아직 어려움이 많다. 무엇보다도 지표조사와 한 번의 발굴 조사만 이루어져 유물 자체의 상대 편련이 정립되지 않았으며 제작 집단의 문제도 장보고와 관련해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

해남지역 도자문화
  • 문헌고찰

    해남 지역에 도자와 관련된 문헌은 기록이 영세한 고려 시대를 제외 하더라도 조선 시대 이후의 기록도 여섯 건에 불과 하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가 각 한 곳이 있는데 이후의 경국대전과 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지에 도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해남지역의 도자제작이 민수용으로 한정되어 소규모로 운영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시대 사회가 안정되면서 왜구의 침탈에서 벗어난 내륙지역으로 도자산업의 중심이 이동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 같은 결과는 영암과 나주, 순천 등에 많은 사기장이 배치되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산이면과 화원면에 분포한 고려시대의 청자 가마터를 제외한다면 타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에 도자가마터가 많지 않음에서도 알 수 있다.

  • 해남지역 도자 가마터

    해남 지역은 송지면 군곡리 패총에서 토기 가마터가 발굴 조사되어 일찍부터 도자제작 기술이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산이면 진산리 일대 청자 가마터(사적 제301호)와 화원면 신덕리 일대 초기 청자 가마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산이면 일대 가마터는 구성리와 진산리, 초송리 등에서 모두 106기가 조사되었으며 화원면 일대에서는 모두 56곳의 청자 가마터가 조사되었다. 이곳은 소규모 단일 지역에 짧은 시기에 축조된 가마로는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또한 수적인 면에서도 180여기가 분포되어 잇는 강진군 대구면 일대 청자가마터에 버금가는 대규모 집단 가마로 한국 도자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초기 청자 제작시기에 도입된 양 지역의 청자 제작기술과 양식, 세력집단 등에 대한 상호 비교가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진산리 제17호 가마터가 발굴 조사되어 가마구조 등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완도 어두리 해저 출토도자(30,673점)의 생산지가 산이면 진산리 일대임이 밝혀져 해남 지역 도자 문화의 의미가 더욱 증대되었다. 이들 고려청자 가마터 이외에도 분청자와 백자 가마터 등이 분포하고 있다.

    1. 화원면 가마터

      화원면은 해남군 북서 쪽 끝에 잇는 화원반도 중심 지역으로 목포시와 인접해 있다. 이곳은 삼면이 바다이며 남북으로 길게 산맥이 뻗어 있어 산악이 많고 평야가 적어 해변 산중의 지역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이 완만한 경사의 구릉들로 이루어져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화원면 가마터의 중심은 신덕리 일대로 신덕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방이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 싸여 있다. 신덕리 가마터는 신덕저수지 일대와 국도 양편의 구릉과 골짜기, 경작지 등에 밀집 분포되어 있는데 훼손이 적고 퇴적층이 두터워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이들 가마터는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학술조사는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실시하여 2000년 15곳의 가마터를 정리하였다.
      2001년 목포대학교 박물관 조사에서는 41곳이 추가 조사되었다. 마을별로는 신덕리 54곳, 금평리 2곳이며 개별가마터는 80~90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초기 청자 가마가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곳은 해남 화원면 지역이 유일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자기 발생의 단서와 초기 청자의 기형 변화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마터로 주목받고 있다.
      출토 유물은 청자, 흑유, 도기, 요도구 등이 있다. 청자의 기종은 대접과 완, 접시, 화형접시, 병, 유병, 편병, 항아리 등으로 타 지역 가마에 비해 단순하다. 이들 기종은 초기 청자 가마들 즉, 봉천군 원산리와 고양시 원흥동, 양주군 부곡리, 시흥시 당산동, 용인시 서리, 서산군 오사리, 고창군 용계리, 진안군 도통리, 강진군 삼홍리, 용운리, 고흥군 운대리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매우 유사하다. 문양은 일부 음각선대를 제외하고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받침은 내화토 빚음에 모래와 수비토가 혼합되어 잇다. 또한 연질 도기질에 녹갈색 유가 얇게 시유된 된 것들은 보령 사호리 가마터 출토품과 비견할 수 있다. 이들은 도기 제작 기술을 계승한 초보단계의 청자로 추정된다. 그리고 중부권 초기 가마들이 백자 전용 또는 백자 청자 겸용 가마인데 비해 화원면 가마에서는 청자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번조방법과 태토, 유색 등이 상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초벌 편들이 대부분 가마에서 출토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청자의 테두리가 얇은 것에서도 알 수 있으며 재벌품이 없다는 것은 조질품을 생산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제작 집단이 전통 도기 제작 기술을 계승하고 있어 기존 도기 제작처럼 초벌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화원면 출토청자는 햇무리굽 완과 내화토 빚음 통기공 갑발 등에서 초기 청자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햇무리굽 완의 경우 내저곡면과 내저원각이 공존하며 굽바닥 너비도 다양하다. 즉, 고식 햇무리굽에서 변형 햇무리굽까지 짧은 시기에 변천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초기 청자의 대표적 기형 중 하나인 화형접시는 외면에서 살짝 눌러 제작하였는데 화형접시에서는 태화단계의 것으로 용인 서리 3기층과 시흥 방산동 후기층에서 출토된 화형접시와 유사하다. 따라서 화원면 청자의 제작 기간은 초기 청자제작시기에 도입되어 50년 내외의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산이면 가마터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를 중심으로 산이반도에 분포하는데 북쪽은 영암 삼호 반도 남서쪽은 해남 화원반도와 접해 있다. 가마터는 초송리 남쪽에서 진산리에 이르는 약 6km의 구 해안선에 집중적으로 산재한다. 이곳은 경사가 완만한 낮은 구릉지대로 질 좋은 조점토 광맥이 해안 단예면을 따라 곳곳에 노출되어 있어 이를 채취하여 쉽게 도자를 제작할 수 있었다. 또한 예전에는 높이가 낮은 야산 구릉이었기 때문에 산림이 풍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형이 점토와 황토로만 이루어져 바닷물에 의한 침식이 지속되어 가마가 유실되는 등 원래의 지형이 크게 변형되었다. 가마터는 산이반도 서북단의 구성리 2기와 반도 중간 지점의 진산리 남쪽 해안과 내륙 연결지역에 80기, 초송리 24기 등 모두 106기가 분포하고 있다. 토적층은 현재 논으로 개간된 옛 모래사장에서 대부분 확인되었으며 퇴적이 잘 남아 있는 5곳(4,022평)이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출토 도자류는 청자류와 흑갈류 도기, 회청색 연질 경질자기 등이 있으며 극히 소량의 백자편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중 청자류는 순청자와 철채청자, 철화청자, 철백화청자, 양음각청자, 투각청자, 상형청자 등이 확인된다. 요도구는 경사진 원형(개떡형) 도지미와 구멍과 기호가 새겨진 원통형갑발, 그리고 가마벽 편과 조개껍데기, 규석 등이 발견되었다. 청자류는 조접토에 조잡한 유약이 시유된 조질 청자와 정선된 회청색 바탕흙에 좋은 유약이 시유된 양질 청자로 나누어지는데, 조질의 녹청자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급 청자는 이들 점토 중에서 모래가 전혀 섞이지 않은 질 좋은 점토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유약은 태토에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적갈색 또는 암녹색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일부 양질의 담청녹색의 청자유가 시유된 청자편도 있다.
      가마에 따라 다른 듯 굽 주위를 시유한 것과 시유하지 않은 것이 섞여 있다. 번조는 회백색 굴 껍데기 가루와 내화토 가루 등을 굽바닥 4~5곳에 얇게 받쳐 구웠으며, 대접과 접시는 내저면에도 받침을 받쳐 포개 구웠다. 문양은 크게 순청자와 철화청자로 구분된다. 순청자는 대부분 무문이며 내층면에 일조의 음각선대나 연판문과 국화문, 초문 등을 음각으로 거칠게 시문한 것이 소량 출토되고 있다. 양각은 연판무늬가 소량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마터에서 출토되는 철화청자는 병, 장고, 주전자, 대반을 중심으로 완, 잔 등에서 확인된다. 문양은 간략한 초문과 초화문, 목단문, 당초문, 국화문 등이 자유분방하게 시문되었다. 유약은 대체로 산화된 녹갈류 또는 갈색을 띠는 청자유를 시유하였다.
      산이면과 함께 조질 청자의 대표적 가마인 인천 경서동 가마는 산이면과 유사한 시기에 운영되었으나 더욱 조질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있어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산이면 지역 청자의 제작 시기는 선후의 차이는 있으나 11세기를 중심으로 운영된 후 점차 쇠퇴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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