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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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가 남긴 역작들

초의집(艸衣集 上 下)

<艸衣集 上, 艸衣集 下>로 나누어져 있다.
초의선사가 쓴 많은 시들은 대부분이 자연을 노래한 것들이다. 깊은 산 속에서 느끼는 자연의 오묘함을 초의선사의 시각에서 본 느낌을 진솔하게 표현했는데 그것은 초의선사의 자연관이라 봐도 무방하다. 자연에 일체를 맡기고 찻잎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며 자연 속의 한 점으로 오롯이 앉아 있는 자세를 피력했다. 초의선사의 시 세계에서 독자적 주제는 우주 만물의 모든 실상과 허상 중에서 자연의 신비함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艸衣集 上>은 주로 주유천하 하면서 만들어진 시가 자연성과 인간의 본성, 산속 절집에 살고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들이 대부분이며 <艸衣集 下>에서는 편지글과 상량문, 중건기, 권선문, 제문, 시집의 발문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음에 上 , 下에서 시 한편씩을 싣고 서문, 발문을 싣는다.

[가을에 부쳐]

내가 사는 깊은 곳에 참으로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은 뜰 안에 가득한 紫竹과 烏竹
그들이 가을 찬 기운을 꺼리지 않는 것은
이미 엷은 대무늬 옷을 입었음이리라.
가을 비 골짜기에서 몰려 와
앞 뜰 연못에 넘실댄다.
마름꽃 수초는 간데없고
뒷산 그림자만 듬뿍 잠겨있더라
[임금이 낸 제목 新月에 부쳐]

초생달이 고웁게 초저녁 하늘에 떴더이다
그 맑은 빛이 어슴프레 한없이 비치고
잔별이 빙 둘러 있으며 은하수 또한 맑은데
옥로에 소매 적시며 잠 못 이루더이다

<艸衣集 上, 艸衣集 下>의 서문은 연천거사(淵泉居士) 홍석주(洪奭周)와 조선후기의 최고 시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가 썼으며 석오 윤치영(石梧 尹致英)과 영천 신헌구(靈川 申獻求), 평주 신관호(平州 申觀浩), 원응 계정(圓應 戒定)이 발문을 썼다.

草衣詩集 序

한퇴지(韓退之)는 평생 부도(浮屠;불교)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나 원혜(元惠), 문창(文暢) 두 영사의 시문을 보고 그 재주를 극찬하였으며 자양부자(紫陽夫子)는 유도(儒道)를 본분으로 하면서도 지남상인(志南上人)의 문집에 발문을 쓰면서 그 문집에 있는 ‘옷을 적시려면 살구꽃 비를 맞을 것이고 갯버들 수양버들 사이의 바람 은 얼굴을 스쳐도 싫지가 않더라’는 구절을 찬양하였다. 석씨(釋氏·佛家)의 학문이 세상을 허무하게 여기는 터라 유가에서는 쓸모없는 글이지만 저들(원혜, 문창, 지남상인)은 글을 쓰면서도 유도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두 공(韓退之, 紫陽夫子)이 그들의 시문에 즐거이 발문을 썼던 것이다.
..중략,
이 초의시집 중에는 창여운(昌黎韻) 몇 편이 있는데 그 내용이 어질고 곧으며 잔잔하여 주자서(朱子書)와 부합 된 바 많다. 그대는 참으로 유도(儒道)에도 뜻이 있는 사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기꺼이 초의시집에 서문을 쓰나니 그의 시에는 세인을 깨우치는 구절이 많은데 ‘발로 물속의 구름을 헤치는데, 창문은 소나무 위에 뜬 달 을 머금었도다’는 그의 시와 위의 행화양류(杏花陽柳)귀절은 그 어느 것이 더하다 덜하다 말할 수 없도다.
신묘(辛卯 1831)일월 연천거사(淵泉居士) 홍석주(洪奭周) 초의시집 머리에 씀.

*注: 홍석주(1774~1842) 조선조 정조 때의 문신으로 좌의정을 지냈으며.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이고 풍산 사람이다. 그의 벼슬은 이조판서 와 대제학을 지냈고 한학과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특히 한학과 문장에 있어서 10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의 저서에 <연천집>이 있 다.

홍석주는 서문에서 초의선사가 불가에 몸담고 있지만 불가의 가르침과 유가의 가르침을 동시에 품고 있어서 격이 넘친다고 말한다. 또한 세속에 물들지 않은 초의 선사의 품성을 높이 칭송하고 있다.

履雜澗底雲
窓含松上月
물속의 구름을 발로 찾는데
소나무 위 달은 창문에 어리었구나

라는 싯구절은 순수한 자연의 정서를 보여준 것으로써 읽고 있으면 절로 초의선사의 모습이 눈에 선히 떠오른다. 연못 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가 마침 연못 속에 떠 있는 달을 발로 헤집는 광경과 연못 속의 달을 발로 헤치다가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을 때 일지암 창에 어린 소나무와 달그림자 또한, 눈 감고도 훤히 보이는 듯 하다.

서문

일지암(一枝庵)은 호남의 스님 장의순의 제호이다. 의순이 시를 잘하기 때문에 세인들이 그를 초의스님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이 드높더라. 내가 그의 시를 보니 그 내용이 깨끗하고 잔잔하며 고요하게 가라앉아 참을성 있게 옛선인들의 경지에 몰입하였더라. 이 일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중략,
그의 교유하는 품을 보건대 소동파에 버금가는 인사들과 사귀고 있으니 이 아니 좋은가. 더구나 그의 시에는 중의 티가 가셨으니 저 도잠 총수 따위의 시문과는 비교 할 바가 아니로다. 그는 불경과 격언으로 구업을 삼으면서 또 가는 곳마다 시로써 계(戒)를 삼았다.
...중략
신묘(辛卯1831)사월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북선원의 다반향초지실(茶半香初之室)에서 쓰다.

*주:신위(1769~1847)는 조선조 문인 학자로 시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나 삼절로 꼽혔다. 그의 시는 당시 사회의 부패상과 관료들의 부조리 에 대한 나름대로의 심각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시를 통해서 시를 평한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를 남겼다. 저서로는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와 <신자하시집 (申紫霞詩集)>등이 있다.

자하가 보는 초의선사의 시는 중의 티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불경이나 격언으로 구업을 삼으면서 시로써 계를 삼아 뛰어나다.’는 말과 함께 시작불사 에 게으름 피우지 말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草衣詩藁跋

신해년(辛亥) 겨울에 내가 병에 시달리고 있는데 용리(?吏)가 와서 초의스님 왔다고 하기에 버선발로 뛰어나가 끌어안고, 삼화(三花)와 같은 나의 초췌한 모습을 걱정하면서 사리에 맞는 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느새 병이 나아 버렸었다. 그때 경해(초의의 제자)가 품에서 초의의 시집을 꺼내 보여주었다.
진즉부터 그의 말을 들어왔고 또 한 번 보고 싶던 터여서 등을 밝히고 그의 시를 감상했다. 그의 시는 놀랍게도 깨달음이 많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그 높은 품격이 마 치 쟁반에 옥을 굴려 비스듬히 구르고 사뿐히 솟는 듯 하여 밤톨을 떡가루에 묻힌 듯 능소화처럼 홀로 아름답도다. ...중략, 미루어 스님이 학사들과 교유했고 대부들 과 사귀어서 유도에도 뜻이 깊음을 짐작되도다. 자하가 말하기를 소순기를 벗어났다고 한 것이 모두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로다. 그리고 <동다송> 한 편도 육우의 다경 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하다. 하물며 글이 잔잔하게 가라앉고 헛소리가 없으며 어긋난 것도 없어서 능히 피안에 이르렀으니 어찌 혜휴나 보월과 같은 무리들이 나란히 어깨를 견줄 수 있겠는가. 돌이켜보건데 나는 이미 시들고 메마른 매미 껍질이어서 감히 무어라 비평할 형편은 못되지만 그와 더불어 노는 자리에서 그의 청을 받들어 책 끝에 이글을 쓰노라.
석오(石梧) 윤치영(尹致英) 쓰다.

注: 윤치영(尹致英)-헌종 때의 문신. 자는 관여(觀汝), 호는 석오(石悟), 본관 해평.
용리(?吏):소식을 전하는 벼슬아치
삼화(三花):봄, 여름, 가을 동안 피었다가 겨울이면 지는 꽃을 말하는 것으로, 병이나 근심으로 여윈 것을 비유한 말

발문을 쓴 윤치영 역시도 초의선사의 시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윤치영은 병석에 있다가도 초의선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병이 나았다고 말한다. 실제 병 이 나았을까마는 그만큼 초의선사와의 대화가 즐거웠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짙은 주황색으로 종처럼 달려 한 송이, 한 송이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꽃 능소화에 초의선사의 시를 비유했다는 것으로 윤치영은 누구보다도 초의선사의 시를 극찬한 사람인 듯, 초의선사의 시에 푹 빠져 칭송이 화려하다. 또한 <동다송>을 말하면서 차에 대하여 깊고 심오한 경지를 부러워하는 처지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발문

옛 부터 사원(寺院)에서 이름 난 자는 모두 학덕이 높은 사람에 의지해서 이름을 떨쳤다. ... 중략, 초의 의순은 근세에 계를 잘하는 사람으로 내가 일지암에서 그 의 시 몇 수를 보니 모두 멀리 맑고, 깊이 담담하며 때 묻지 않고 깨끗하게 다듬어졌다. 연천은 군더더기를 끊어버렸다고 했고 자하는 중의 티를 털어버렸다고 했다. 이는 사람들에게 초의를 지나치게 자랑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한퇴지, 구양순, 소동파에게 의지했던 승려들과는 달리 세상에 이름 떨치기를 즐겨하지 않았음에도 얻어진 것이다. .... 중략
을해(乙亥) 10월 백파거사 영천 신헌구는 초의선사의 수제자 월여의 선실에서 쓰노라

발문

초의선사의 시집에는 연천 홍선생이 서문을 썼고 우리 씨족의 대부 자하선생이 뒤를 이어 서문을 썼다. 시집에서 시를 주고받았던 이들은 대개 이름 난 사대부이니 내가 초의선사와 함께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초의선사는 선림(禪林)에 묻혀 살면서 불가의 이치를 깊이 깨우쳐서 근세의 선림에서는 견줄 이가 드물 었다. 연천선생은 말하기를 깨끗하고 감칠 맛 넘치게 깔끔히 다듬어서 당송의 시풍을 넘나들었으며, 어질고 의로움을 품었다....... 중략 내가 해남에서 유배생활을 할적에 초의선사는 갈대숲을 헤치고 험난한 길을 지나 나를 찾아왔었다. 그때 나는 진서산(중국 남송 때의 철학자)이 편찬한 <심경(心徑)>을 읽고 있었는데 초의선사 와도 함께 읽으며 깊은 뜻을 헤아리며 담론을 주고받았다. 초의선사는 가는 길에 그 책을 빌려갔는데 다음 해에 다시 돌려주면서 아울러 그가 지은 시 3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발문을 써 달라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하니 그의 시와 뜻과 배움은 연천선생이 자세히 논하였고 자하선생도 칭찬하였으니 내가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다 만 그가 경전을 빌려가서 한 해 동안 공부한 것으로 보아서 지난 날 보다는 근래에 얻은 바가 컷을 것이로다. 내가 생각건대 초의선사 같은 사람은 <주역>에서 말한 ‘돌아가는 곳은 같으나 가는 길이 다른 이’인 것이로다.
신해년 9월에 평주 신관호는 발문을 쓰다.

*注: 신관호(申觀浩)-호는 위당(威堂) 추사의 제자로 우수영의 수사를 지냈고 초의선사 기념탑을 세울 때 그 비문을 썼다.

발문

대체로, 시라는 것은 천취(天趣)에 근본 하여 언사(言詞)로써 펼치는 것이다.
일지암 화상(和尙:덕이 높은 스님을 말함)이 일생 경을 펴는 동안에 틈틈이 유사(儒士), 승려들과 함께 문장을 지어 서로 주고받았으니 연(聯)마다 속되지 않고 아름 답고 격조가 높아서 자연히 성율에 부합, 가히 당송의 격조와 견줄만한 글이로다. 그 명성이 당대에 펼쳤으니 곧 하늘을 본받아 그 정을 꽃피웠음을 이르는 소치이니 라. 그렇듯 훌륭한 글을 그냥 묻혀두기가 아까워 그의 법손(法孫)인 상운(祥雲)과 응혜(應惠)와 법제(法弟)인 쌍수(雙修)와 일한(一閒)이 각별한 정성을 모아 편집하 고 인쇄하는지라 나 또한 그 자취를 남기는 바이다.
병오(丙午) 사월 이십 일일 원응 계정(圓應 戒定)이 근서하다.

초의선사의 시집에는 여러 사대부가의 명문장가들이 서문과 발문을 작성했다. 그 중 평주 신관호는 자하 선생이 조부이기도 하지만 추사의 수제자이며 초의선사를 기념하는 탑을 세울 때 그 비문을 쓰기도 했다. 특히 평주의 발문에서 보면 초의선사가 얼마나 학문에 깊은 뜻이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평주가 해남에서 유 배생활을 할 적에 험한 산길을 지나 평주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당시 유배 인들은 한다하는 사대부가 학문가들이어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이나 책을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궁벽한 촌구석에서는 횡재를 한 셈이 된다. 다산과 같은 거유가 해남 근처 강진에 유배생활을 했던 것도 초의선사로서는 뜻하지 않은 귀인 을 곁에서 만나 뵐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자신이 만든 차를 들고 다산을 찾아 경전이나 유가 서책들을 빌려보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하물며 평주는 산길이 비록 험 하다고는 해도 해남 땅 지척에 있었으니 더 자주 찾아서 만나곤 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초의선사는 그가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빌려갔다가 소중히 읽고 다시 돌려 주는 학구파였던 것이다. 윗글에서 보는바와 같이 평주가 가지고 있던 귀한 책 <심경>을 일독하고 싶은 생각에 빌려달라고 해서 일 년 동안에 탐독을 하고 돌려주었다 는 대목만 봐도 초의선사의 학문에 대한 열성을 이내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초의선사가 그 자신의 덕목으로 주위에 사대부가들이 모여든 것이 아니라 초의선사 스스 로 사대부가와 친교를 맺어 자신에게 부족한 학문을, 또는 시문을 익히고 싶은 생각에 그들을 가까이 하고 자주 찾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다송(東茶頌)

해거도인(海居道人)으로부터 ‘차를 알고 싶다’는 부탁을 받고 <동다송>이 태어난다. <동다송>에 나오는 차의 모든 것은 대개 중국의 고사와 전설 등을 인용하여 칠언오구의 시로 표현했고 시 밑에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썼다. 여기서 현대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토록 하기 위하여 초의선사의 <동다송> 전문을 풀어 싣는다.

東茶頌
承海居道人命作
艸衣沙門意恂
해거도인의 명을 받들어 짓다
불문에 들어 있는 초의 의순

后黃嘉樹配橘德 受命不遷生南國
密葉鬪霰貫冬靑 素花濯霜發秋榮
姑射仙子粉肌潔 閻浮檀金芳心結
천지신이 좋은 차나무에 귤의 덕을 함께 하여
명을 어기지 않고 남국에 피어나게 했다.
촘촘히 돋은 잎은 눈발을 이겨 겨우내 푸르더니
하얀 꽃은 서리에 씻기어 가을의 으뜸 꽃으로 피었다.
고야산(중국에 있는 산)의 신선처럼 고운 피부 화사하고
염부단금(閻浮檀金) 같은 열매 맺혔다.

차나무는 과로(중국의 차나무)와 같고 잎은 치자와 같으며 꽃은 흰 장미와 같으며 꽃술은 노랗고 꽃은 가을에 피는데 그 향기가 은은하다.

沆瀣漱淸碧玉條 朝霞含潤翠舌
깊은 밤에 내리는 이슬 기운이
푸른 옥처럼 가지를 맑게 했고
아침안개에 젖은 잎은 비취 새의 혀와 같다.

이백이 말하기를 형주 옥천사 시냇가 주변 야산에는 차나무가 스스로 퍼져 자란다. 이 차나무가 벽옥처럼 푸르러서 옥천사의 승려들이 늘 따서 마신다고 했다.

天仙人鬼俱愛重 知彌爲物誠奇絶 炎帝曾載食經
하늘의 선인과 땅의 귀신이 모두 아끼고 사랑했다.
이 나무의 됨됨이 참으로 기이함을 알기에
염제(중국 전설에 나오는 황제)도 일찍부터 맛보았기로
<식경>에 올릴 만큼 좋은 것이다.

염제의 <식경>에 말하기를, 차를 오랫동안 마시면 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생기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했다.

醍?甘露舊傳名
제호(오미의 다섯 번째 맛)와
감로(단 이슬)는 예부터 이름이 전해진다.

신안왕 자란(子鸞)과 예장왕 자상(子尙)이 담제도인을 팔공산에서 뵈었더니 차를 대접했다. 자상이 그 맛을 보고 말한다.
‘이것은 감로(단이슬)이지 어찌 차라 하리까?’
이 글을 인용한 것은 차의 맛을 한마디 표현한 것이다.
나대경(羅大經:남송의 문학가)은 약다시(?茶詩)에서 읊었다.
솔바람 소리와 전나무에 비 내리는 소리 처음 들려오면
구리병을 당겨 죽로에 올려놓고 끓던 물소리 잠잠하기를 기다려
마시는 한 잔 춘설의 맛은 제호보다 더 좋다.

醒酒不眠證周聖
주나라 성인은 ‘차를 마시면 술독을 가시게 하고 잠을 고르게 한다 했다.

즉, 차를 즐겨 마시면 숙취에서 쉽게 깨고 잠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脫粟伴菜聞齊?
제(薺)나라 영(?)은 현미밥에
차 나물을 먹었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보면 영(?)이 제나라 제상으로 있을 때 현미밥과 세 마리의 새 구이와 다섯 개의 알과 차 나물을 먹었다, 라고 하였다.

丹丘乞虞洪薦? 毛仙示?引秦精
차를 즐겨마시던 사람 우홍은 제물을 올려
신선이 산다는 단구산에서 빌었으며
신선의 묘술을 익혀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신선은
차의 한 종류 구명을 주어 차를 즐겨마시던 사람 진정을 이끌었다.

신이기(神異記)에 보면 여요에 사는 우홍이 산에 들어가 차를 따다가 한 도인을 만났는데 그 도인은 푸른 소 세 마리를 끌고 있었다. 우홍을 데리고 폭포산에 이 르러 말했다. ‘나는 단구자라 하오. 그대가 차 마시기를 좋아한다고 하여 한 번 만나보기를 원했었오. 내가 아는 산중에 좋은 차가 있어서 서로 권할만하니 그대가 나중에 제물을 가지고 산신에게 기원해서 남겨주기를 빌면 이룰 것이라, 하였다.
이로 해서 제사를 지낸 뒤에 산에 들어가면 항상 좋은 차를 얻을 수 있었다.
<속수신기>에는 진나라 무제 때, 신성 사람 진정이 무창산에 들어가서 차를 따다가 키가 한 길 쯤 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진정을 데리고 산 밑으로 가서 차 숲을 보여주고 물러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품안에서 귤을 찾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진정은 두려워서 차만 가지고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潛壤不惜謝萬錢
흙에 묻힌 귀신도 만금의 사례를
아끼지 않았노라.

<이원(異苑)>의 기록에 보면 섬현(剡縣)에 사는 진무의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젊은 나이에 과부로 살았다. 그녀는 차 마시기를 즐겼는데 차를 마실 때마다 집안에 옛무덤이 있어서 그 무덤 앞에 제를 올렸다. 두 아들이 물었다. ‘오래 된 무덤에 무엇 하려고 제를 올리는 수고를 매번 하십니까?’ 라고 말하고 그 무덤을 파 없애 려 했다. 그러자 젊은 과부는 아들을 말렸다. 그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 무덤에 3백 여 년이나 머물러 있었소. 그리고 그대의 두 아들이 나 주변 사람들이 항상 허물어버리라고 하는 말을 들었소만 그대의 도움으로 보호되었고 또한 좋은 차로 제사까지 지내주었으니 내 비록 흙에 묻혀 뼈까지 썩었다 해 도 어찌 이 은혜를 보답하지 않겠는가?’하였다. 꿈에서 깨어 새벽에 일어나보니 뜰 안에 돈 1만전이 놓여있었다.

鼎食獨稱冠六淸
솥 안의 음식 많아도 차는 홀로
육정(六情:물, 초장, 단술, 전국술, 간장, 기장술)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장맹양(張孟陽:서진때 문학가)의 <두릉시>에 보면 ‘솥 안에서는 음식이 수시로 나오는데 갖은 맛으로 오묘하게 만들어지네. 그러나 향기로운 차만큼은 육정 중 으 뜸이니 넘치는 맛이 온몸에 스며든다, 고 하였다.

開皇傳醫腦異事
수나라 문제는 뇌를 고친
기이한 얘기를 전한다.

수나라의 문제는 황제가 되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귀신이 그의 뇌를 바꾸어 그때부터 두통을 앓았다. 그때 우연히 어떤 스님이 말했다.
‘그대의 두통을 산속에 있는 차로 치료할 수 있느니라.’
문제가 스님의 말 대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통이 가시고 머리가 맑아졌다. 수나라 문제가 차를 마시고 효험을 봤다는 소문에 의하여 그때부터 모든 사람 들이 산에서 차를 따기 시작했고 차를 마셨다.

雷莢茸香取次生
뇌협(雷莢)차와 용향(茸香)차가
차례로 만들어 졌네.

당나라 때 각림사의 승려 지승은 세 가지 품질의 차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 뇌협차는 자신을 보양하고 훤초차는 부처님께 올렸으며 자색빛 용향차는손님께 대접했 다.

巨唐尙食羞百珍 沁圓唯獨記紫英
당나라 때는 백 가지 진수성찬 먹기를 좋아하고
심원에서는 오직 자영차만을 즐겼다네.

당나라 덕종(德宗:당나라 임금)은 동창공주에게 항상 차를 하사했는데 그 차의 이름은 녹화차와 자영차였다.

法製頭綱從此盛 淸賢名士誇雋永
만드는 법에 강령이 서서 이때부터 성행하니
맑고 어진 명사들이 맛좋은 고기라고 크게 과시했네.

<다경>에서 말하기를 차의 맛을 살찐 고기와 같다고 했다.

綵莊龍鳳轉巧麗 費盡萬金成百餠
용단과 봉단을 만들어 채색비단으로
싸서 꾸미니 교묘하고 아름답도다.
만금을 들여서 백 개의
떡차를 만들었네.

크고 작은 용봉단은 정위(丁謂:송나라 사람, 차를 즐겼다)에게서 비롯되어 채군모(蔡君謨: 송나라 사람, 명필이며 차를 즐겼다)가 완성했는데 향약을 섞어 떡으로 만들고 떡 위에 용봉무늬를 그렸다. 임금에게 진상되었던 것에는 금장식을 그려 넣었다. 소동파의 시에 ‘자줏빛 금빛 백병을 만드는데 만금을 썼다네’라는 싯귀가 있어 짐작해 볼 수 있다.

注 : 차 만들기 공정
차 따기-차 씻기-차 찌기-식히기-물 짜기-즙 짜기-잎 갈기-·비비기-찍기-말리기-빛내기

誰知自?眞色香 一經點染失眞性
누가 참다운 차의 빛깔과 차의 향을 즐기리
한 번 점 찍히고 물들면 진성을 잃는다

<만보전서(萬寶全書>에 보면 차는 본래 참다운 향, 참다운 맛, 참다운 색이 있는데, 한 번 문득 그 타고난 성질을 잃는다고 적혀있다.

道人雅欲全其嘉 曾向蒙頂手栽那
養得五斤獻君王 吉祥?與聖楊花
도인은 본디 모두 그 맛이 좋기를 원해서
일찍 몽산의 봉우리에 올라가 차를 손수 가꾸었다
다섯 근의 차를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니
이게 바로 길상지와 성양화(:둘다 차의 이름)다.

전대사(傳大士:중국의 승려)가 몽산의 정산에 암자를 짓고 차를 가꾼 세월 3년 만에 그 중 뛰어나게 좋은 차를 골라 성양화, 길상지라 이름 붙여 그 중 다섯 근을 가지고 산을 내려와서 임금에게 바쳤다.

雪花雲?爭芳烈 雙井日注喧江浙
설화차와 운유차가 솟아나는
향기를 다투고
쌍정차와 일주차는
강절(江浙: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 그 이름을 떨쳤어라.

소동파의 시에 ‘설화차와 우각차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라는 구절이 있고, 황산곡(黃山谷:송나라 문인)의 시에는 ‘내가 사는 강남에서 운유차를 따네’ 라는 시구가 있다. 소동파가 승원에 이르자 승려 범영이 법당을 말끔히 단장하여 엄숙하면서도 깨끗했는데, 차를 마시니 향기가 그윽해서 ‘이것 햇차요?’라고 물었 다.
범영은 ‘차의 품성 상 새 차와 묵은 차를 섞으면 향과 맛이 되살아납니다’ 라고 하였다.
초차(草茶)는 양절지방에서 자라는데 그 지방의 차 중에서 일주차가 가장 품질이 좋으며 나중 홍주의 쌍정차와 백아차가 점차 퍼져나갔다. 근세에 만들어진 것은 더욱 그 품질이 좋아져서 일주차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그래도 초차가 최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建陽丹山壁水鄕 品題特尊雲澗月
건양의 단산은 맑은 물의 고향이고
품질 좋은 차는 구름 흐르는 산골의 달빛 같다

둔재한람(遯齋閑覽:북송의 범정민이 지은 책)에 보면 건양차를 천하제일의 진미라고 하였다. 손초가 초공에게 차를 보내는 서장에 보면 만감후(晩甘候:처음엔 쓰다 가 삼킬 때 단맛이 난다는 뜻의 차 이름)라 말하면서 열다섯 사람을 제각에 보냈다. 이 무리들은 모두 번개가 칠 때를 틈타서 물을 긷고 맛을 조절하였다.
대개 건양과 단산은 푸른 물의 고장이라 월간차와 운감차의 품질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다산 정약용의 차를 구하는 글에서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아침 햇살이 처음 피기 시작하고/뜬 구름은 맑은 하늘에서 희디흰데
나른한 낮잠에서 갓 깨어나고/밝은 달이 푸른 시냇물에 잘게 드리운다.

東國所産元相同 色香氣味論一切
陸安之味蒙山藥 古人高判兼兩宗
동국에서 나는 차는 원래 서로 같아서
빛깔, 향기 맛에 들인 공은 한결같이 평가되고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이 되는데
옛사람 양쪽 품성이 겸비되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동다기(東茶記):다산이 지은 차책)>에서 다산 정약용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차의 효력이 월나라에서 나는 차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건대 빛깔이나 향이나 맛이 조금도 손색없다, 고 하였다. 다서에서 말하기를 ‘육안차는 맛이 뛰어나고 몽산차는 약재로서 가치가 높은데 우리나라의 차는 이 둘의 품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만약 이찬황(李贊皇:차를 즐겨 마셨던 사람)과 육자우(陸子羽:茶經의 저자)가 있었다면 그 사람들은 반드시 나의 말이 옳다고 했을 것이다.

還童振枯神驗速 八老顔如夭桃紅
젊음을 되살리고 마른가지를 떨어뜨려
효험이 신비하고 빠르며
여든 살 노인의 얼굴도
싱그런 복숭아처럼 붉게 물든다

이백은 ‘옥천진공이 노상 차를 따서 마시더니 여든 살의 나이에 얼굴 빛깔이 복사꽃 같이 화사했다. 그리하여 이 차라는 것은 맑은 향기에 빛깔 좋게 익어 다른 것과 달라서 능히 육신을 젊게 하고 야윈 것을 살려 사람의 목숨을 건진다.’라고 말했다.

我有乳泉把成秀碧百壽湯 何以指歸木覓山前獻海翁
나에게 유천이 있어서
수벽탕과 백수탕을 만들지만
어찌 가지고 가서 목멱산(서울 남산의 서쪽 봉오리)의
해거옹(海翁:해거도인 홍현주의 호)에게 바치리.

당나라의 소이(蘇?:)가 지은 십륙탕품(十六湯品)에 보면 백수탕에 대한 글이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사람을 장수하게 하며 혹 말이 막힌 사람이나 일 때문에 폐질에 걸린 사람도 이 탕을 쓰면 곧 원래의 기운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즉, 머리카락 희끗희끗하고 얼굴빛이 창백한 노인네도 젊음을 되찾아 활을 잡고 시위를 당겨 과녁에 맞힐 수 있을 것이고 힘차게 걸어서 먼 길을 떠날 수도 있다.
또한 제 8편의 수벽탕을 말하자면 돌은 천지의 빼어난 기운을 응결시켜 형태를 갖춘 것으로, 이를 쪼아서 다듬어 그릇을 만들면 그 빼어난 기운이 그릇에 남게 되고 그 탕에는 좋지 않은 것은 남지 못한다 했다.
최근에 유당 김노경 선생이 남쪽으로 두륜산을 지나다가 자우산방에서 하루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의 샘물을 맛보시더니 ‘물맛이 수락(소나 양의 젖으로 만든 음식)보 다 좋구려’라고 하시더라.

茶有九難有四香 玄妙用
차에는 아홉 가지의 어려움과
네 가지의 향이 있는데
심오하고 미묘하게 쓰인다.

다경에 말하기를 차에는 아홉 가지 어려움이 있다.

  • 첫째, 만드는 것(造)
    그늘에서 따서 밤에 말리는 것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 둘째, 분별하는 것(別)
    씹어서 맛보거나 향내를 코로 맡는 것은 분별하기가 아니다
  • 셋째, 담는 것(器)
    노린내 나는 솥과 비린내 나는 사발은 담는 그릇이 아니다
  • 넷째, 불을 지피는 것(火)
    덜 마른 나무와 물이 묻은 숯을 쓰는 것은 불이 아니다.
  • 다섯째, 물(水)
    물살이 빠른 여울과 막혀서 고인 물은 물이 아니다.
  • 여섯째, 굽는 것(灸)
    겉만 익고 속이 덜 익은 것은 굽는 것이 아니다.
  • 일곱째, 마무리 짓는 것(末)
    푸른 먼지가 일고 가루가 흩날리는 것은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다.
  • 여덟째, 달이는 것(煮)
    어줍게 다루거나 덤벼서 휘젓는 것은 달이기가 아니다.
  • 아홉째, 마시는 것(飮)
    여름에는 즐겨 마시다가 겨울에 그만 두는 것은 마시기가 아니다.
何以敎汝玉浮坮 上坐禪衆
어찌 너로 하여금 옥부대 위에
많은 사람들을 좌선케 할 것인가.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리 널리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차밭 중 이렇게 넓은 것은 없다. 계곡에는 옥부대가 있고 그 밑에는 칠불선원이 있다. 좌선하는 사람들이 항상 늦으막이 오래된 찻잎을 따서 햇빛에 말리고 솥에 넣어 땔나무를 지펴 끓이는데 마치 나물국을 삶듯이 삶으니 빛깔은 짙고 탁하며 맛도 몹시 쓰고 떫다. 정소(政所:절에서 사무를 다루는 곳)가 천하의 좋은 차를 속된 솜씨로 다 망쳐놓았다, 고 하였다.

九難不犯四香全 至味可獻供九重 翠濤錄香?入朝
아홉 가지 어려움 어기지 않고
네 가지 향기 온전하면
지극한 맛으로 가히 궁중에 바칠 만 하니
비취빛 물결과 순한 향기가
겨우 조정에 들어간다

다서에서 말하기를 ‘사발에는 비취빛 물결 일렁이고 맷돌에는 푸른 가루 나부끼네’라고 하였다.
진미공(陣眉公:명나라 문장가)의 시는 차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아름다운 그늘을 쌓아 덮개를 가렸고 신령스런 풀로 영험함을 시험한다네. 대로 대나무 화로에 그윽하게 끓이니 관솔불(松火)은 성내어 나부끼네 불은 어우러져 감 돌고 차는 다투어 그윽하게 우러나네. 초록빛 향기가 길가에 가득하여 영원히 돌아가기를 원한다네.

總明四達無大壅 ?彌靈根托神山
귀 밝고 눈 밝아 사방에 미쳐 막힘이 없으니
하물며 그 영험한 뿌리를
신성한 산에 의탁하고 있다

지리산을 세상에서는 방장산이라고 하여 신령한 산으로 말한다.

仙豊玉骨自?種 錄芽紫荀穿雲根 胡靴?臆皺水紋
신선 같은 풍모와 고결한 풍채는 별다른 종류이고
푸른 싹 자색빛 순이 흰 뿌리를 뚫고 돋으니
오랑캐의 가죽신, 들소의 가슴팍처럼
주름진 물무늬가 아롱진다

<다경>에서 말하기를 차는 풍화작용으로 문드러진 자갈땅에서 나는 것이 으뜸이며 조약돌 섞인 밭에서 자란 것이 그 다음이다. 또 골짜기에서 자란 차가 가장 좋다고도 했는데 화개동 차밭은 모두 골짜기와 자갈땅에서 자라기 때문에 좋은 조건을 함께 갖추고 있다. 다서에서 또 말하기를 자색빛깔의 차가 가장 좋고 물결무늬가 있는 것이 다음이며, 푸른 빛깔을 띤 것이 그 다음이며 죽순 같은 것이 가장 좋고 싹처럼 생긴 것은 그 다음이며 그 모양에 있어서는 오랑캐의 가죽신 같은 것은 주름 잡혀서 오그라든 듯하고 들소의 가슴팍 같은 것은 구불구불 곱게 물결치며 가볍게 이는 바람이 흔들리는 듯 촉촉한 것이 있으니 이러한 모든 것이 차의 순수하고 좋은 맛을 낸다.,/p>

吸盡??淸夜露 三昧手中上奇芬
자욱이 내린 맑은 밤이슬 흠뻑 마시니
삼매에 젖은 손에 기이한 향기 스며든다.

다서에서 말하기를 차를 따는 시기는 때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했다.
소동파의 <송겸사시>에 보면 ‘스님께서 새벽 일찍 남병산을 나와 삼매에 든 손길로 차를 딴다네’ 라고 하였다.

中有玄徽妙難顯 眞精莫敎體神分
그 안의 현미함이 담겨있지만 오묘해서 드러내기 어렵고
참된 정기는 본체와 신령스러움을 나타낼 수 없다

<만보전서>의 차 만들기에 이르기를 ‘새로 딴 차는 오래된 잎을 가려서 버리고, 솥이 가장 뜨거워졌을 때를 기다렸다가 차를 떨어뜨리기 시작하여 얼른 덖는데 불길을 늦춰서는 안 된다. 익기를 기다려서 차츰 체에 넣고 거른 뒤 가볍게 묶어서 도리깨로 골고루 두드려 준다. 그런 다음 다시 솥에 넣고 볶다가 차츰 불기를 줄이면서 말린다. 그 속에 그윽하고 미묘함이 깃들여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샘물의 품평>에서 이르기를 ‘차는 물의 정신이요, 물은 차의 본체이다. 때문에 참물이 아니면 그 정신을 드러낼 수 없고 참된 차가 아니면 그 본체를 드러낼 수 없 다’고 하였다.

體神雖全猶恐過中正 中正不過健靈丙
본체와 정신이 비록 온전하더라도
오히려 중정을 지나칠까 두렵고
중정을 넘지 않으면 건실함과
신령스러움이 아우러진다

<만보전서> ‘물거품다루기(泡法)’에 이르기를 끓이는 물이 온전하게 익었는가를 살펴서 조금만 따라서 그릇 안에 부어 그릇의 찬 기운을 몰아낸 다음 따라 버린 뒤에 찻잎을 적당히 넣는다. 중요한 것은 차의 많고 적음을 알맞게 하여 중정을 잃어 공평함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차가 많으면 맛이 쓰고 향기가 약해지며 물이 많으면 빛깔은 고와도 맛이 없다. 찻병을 두 차례 우린 뒤에는 또 찬물로 깨끗이 흔들어 씻어서 다기를 서늘하고 깨끗하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차의 향기가 줄어드는 것이다.
평하자면 차를 딸 때에는 그 오묘함을 다하고 차를 만들 때는 그 정성을 다하고 물은 참된 것을 얻으며 물거품 다루기에 그 중정을 얻으면 본체와 정신이 서로 화합하 여 건실함과 신령스러움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런 경지까지 도달하면 다도를 정성으로 한 것이다.

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己涉上淸境
옥화차 한 잔을 마시면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일어
몸이 가벼워져서
이상적 세계의 경지를 넘나들게 된다.

진간재(陳簡齋:송나라 시인)의 다시(茶詩)를 보면 옥화차를 마셨다는 싯구가 있고 노옥천(盧玉川:당나라 시인)의 다가(茶歌)에 보면 양쪽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다는 싯구가 있다.

明月爲燭爲友 白雲鋪度因作屛
竹?松濤俱蕭凉 淸寒瑩骨心肝惺
唯許白雲明月爲二客 道人座上此爲勝
밝은 달빛을 촛불과 벗으로 삼고
흰 구름은 자리를 만들고 병풍으로도 만든다
댓잎 소리 솔잎의 물결소리 모두 소슬하고
뼈에 스미는 맑고 찬 기운에 마음도 깨어난다
오직 흰 구름 밝은 달을 두 손님으로 맞아 홀로 차를 마시니
도인의 자리가 이보다 더 좋을까

<동다송>을 치하하는 글
먼저 석오(石梧) 윤치영(尹致英)은 <초의시고>의 발문 중에 <동다송>에 대한 치하를 아래와 같이 곁들였다.

東茶頌一篇 與桑苧書 相上下
<동다송> 한 편은 상저(桑苧:당나라 육우의 호)의 책 <다경>과 함께 서로 위아래를 비견할 만하다.

그 후, 백파선사(白坡禪師)의 원사손(遠飼孫)인 석전(石顚) 영호화상(映湖和尙, 1870~1948)은 <동다송>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해양(海陽) 초의상인(艸衣上人)은 두륜산 속에서 도를 닦으면서 명문가의 명사들과 오가니, 그 당시 세상에서는 도림(道林), 혜원(惠遠)이라 일컬었다.
그의 <동다송> 한 편은 육우의 <다경>과 필적하므로 미처 읽기를 마치지 않았어도 맑은 바람이 솔솔 분다.

또한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조선상식문답> 속편에 적고 있다.

해남 대흥사의 스님인 초의선사 의순이 다도에 깊이 빠져, 재배와 포제 모두에 그 묘리를 얻고 다산, 추사 등의 추만(推挽)으로서 대둔산은 물론이요, 지리산 백양산, 선운산 등의 차 이름이 다시 세상에 파전(播傳)하고 거기 따라 각 지방의 다산(茶産)이 차차 소복(?復)하여 길을 밟게 되니 다산의 <동다기>와 초의선사의 <동다송>은 조선에 있는 다도 부흥상 흥미 있는 문헌입니다.

김여칠(金麗柒)의 논문집 <초의선사 의순의 생애>에서 동다송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동다송>은 가로 17cm, 세로 14cm의 작은 책자로서 19장의 한지에 초의선사 자필로 써 있다. 이 책은 초의선사가 중국의 만보전서나 고전 등에서 읽은 넓은 지식을 토대로 하여 재배에서 제조 탕제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바를 가미시켜 시적 운율로 기술하고 있다.
... 중략 살피건대 차가 보건음료라는 형이하학적인 측면과, 차가 도덕 음료라는 형이상학적인 측면으로 구성된 <동다송>은 오늘날에도 다도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또한 1918년 이능화(李能和)가 쓴 <조선불교통사>에 <동다송>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으며 문일평(文一平)은 <차의 옛일>이라는 책에서 초의선사와 <동다송>을 이렇게 격찬하고 있다.

다산의 <동다기> 보다 더 뛰어난 차 기록이 있다. 초의선사의 <동다송>이다. 초의선사는 차의 달인이어서 세상 사람들이 차 마시기를 잊고 있던 시절에 홀로 토산차를 즐겨 마셨고 차를 노래한 시를 지었다.
동다(東茶)란 동국차(東國茶:우리나라 차), 곧 토산차를 지칭한 것이다. 그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나 그 내용이 토산차의 음영(吟?)과 기록으로서 어느 의미에서 <동다송>은 조선의 <다경>이라 했고 초의선사는 조선의 육우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다송>의 내용을 알리기 위하여 한 예를 들어본다.
초의선사의 차노래 주해에 의하여 분명히 화개동에 사오십리 차나무가 있는 것과 그것이 조선 최대의 차밭이 되는 것과 또 칠불암 선승들이 항상 그 차를 따서 마시는 것을 말하였다. 초의선사는 다시 정다산의 <동다기> 중 일부를 인용하여 말한다.
‘어떤 이는 동다의 효험이 월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나 내가 볼진대 빛깔, 향기, 맛이 조금도 차이가 없으며 육안차는 맛으로 뛰어나고 몽산차는 약으로 뛰어나지만 동다는 두 가지를 모두 겸비했다.’

그 후에도 우록 김봉호와 김명배의 <초의선집>에서도 초의선사의 <동다송>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는 바, 초의선사의 <동다송>은 지금까지도 차를 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른 지침서로 통하고 있다.
해거도인의 청에 의하여 지은 <동다송> 한 편이 후세에까지 이렇듯 칭송을 받게 되는 것으로, 만약 초의선사가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다면 해거도인에게 감사의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주고받은 또 다른 글 몇 편을 골라본다.

[一絶呈海居 해거도인에게 지어올림]

綺席元來海樣寬 亦容癩可瘦權寒
敢將禁體?新案 無字經中試擧看

이렇듯 좋은 모임에 원래 바다처럼 관대한 마음으로
나와 같은 천객을 함께 하도록 용납하였네
감히 시를 짓고 여러 말 하도록 하신 것은
그대는 무자경(無字經)의 정신 부처의 진리로 나를 대하는 것이로다
주:무자경(無字經)-글자가 없는 경전이란 의미로 말이나 글귀의 형식을 떠난 부처의 진리

초의선사는 책을 지어 해거도인에게 글(上海居道人書)을 올린다.

....중략 건강하신지요? 우러러 묻습니다. 산 속에 묻혀 사는 중 초의가 해거도인께 삼가 글을 올립니다. 장지화(張志和:당나라의 숙종 때에 벼슬을 지냈으나 방랑으로 일생을 마침) 가 이르기를 ‘하늘과 땅을 거처로 삼아서 살고 해와 달을 등불로 삼아 온 세상의 여러 양반들과 더불어 있으니 그곳은 일찍이 떨어져 있어 본 일이 없었다’ 고 하였습니다. 천 그루의 소나무 밑에서 밝은 달을 대하여 수벽탕(秀碧湯:당나라 소이가 지은 탕품(湯品) 중 제8품)을 달여 백수탕(百壽湯:탕품의 제3품)이되면 아닌 게 아니라 도인에게 갖다 드리려고 생각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중략... 근래 북산도인(北山道人:진도부사 卞持和)이 해거도인께서 소인의 다도를 물으셨다하기에, 옛 사람들의 전하는 뜻에 따라 마침내 <동다송> 한 편을 지었습니다. 아직도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은 원문을 베끼고 나란히 세워서 나타내는 것으로써 물으시는 뜻에 답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만 물으시는 뜻에 답이 잘되었는지 조심스럽습니다. 글 속에 한 구절이라도 소용에 닫지 않는 것이 있다면 금비지로(金?之勞:문장을 정정하는 일)를 아깝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 편지는 1837년 초의선사 나이 52세에 썼다. 글 내용으로 보아 한양에 사는 해거도인이 해남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진도에 내려가 진도부사로 재임하고 있는 변지화에게 명(命)하여 초의선사에게 다도를 물어서 지은 것이다.

우리는 실제 어떤 글을 쓰고 싶은 마음 간절하더라도 게으름을 피우다가 누군가의 부탁을 받으면 그때부터 시작하게 된다. 초의선사의 <동다송>이 거기에 속한다고 본다. 초의선사는 운흥사 시절 벽봉스님에게 수련할 때부터 시작하여 차에 관한 오랜 경험과 육우의 <다경>을 읽은 지식으로 글로써 술술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있었던 터다. 때문에 변지화를 통해 해거도인의 부탁이 있자 곧 그 작업에 임했던 것이다.
<동다송> 전체를 흐르는 문맥으로 봐서 초의선사는 차를 따는 것과 만드는 과정 또 물과 차를 우리는 법을 크게 강조하고 형식적인 번거로움을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도가 지향할 최후의 목표는 중정(中正)이라고 했다.

‘따는데 그 묘(妙)를 다하고 만드는데 정(情)을 다하고 물은 진수(眞水)를 얻고 끓음에 중정(中正)을 얻으면 체(體)와 신(神)이 서로 어울려 건(健)과 신령(靈)함이 어우러지니 이에 이르러 다도라 하느니.’

어떻든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응송 스님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우록이라는 풍류 문학가가 갈고 닦아서 <동다송>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 후, 많은 사람들, 특히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초의선사’ ‘초의선사’ 하고 초의선사의 이름을 칭송하게 된 것이다.

茶神傳

抄出 萬寶全書
[만보전서]에서 가려내다

차 따기(採茶論)

차를 따는 시기는 때를 잘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무 빠르면 향기가 온전치 못하며, 늦으면 신성한 기운이 흩어진다. 곡우 5일 전을 으뜸으로 삼으며, 곡우 5일 후가 그 다음이며, 다시 5일 뒤가 그 다음이다.
어린 찻잎은 자줏빛 나는 것이 으뜸이요, 주름진 가죽 같은 것이 버금가며, 둥근 잎이 그 다음가며, 가는 댓잎처럼 빛나는 것이 질이 제일 떨어진다.
또한 밤새도록 구름 한 점 없이 이슬에 젖은 것을 딴 것이 으뜸이요, 햇볕에 딴 것이 다음이다. 날이 흐리거나 비가 내릴 때는 따기에 마땅치가 않다.
골짜기에서 나는 것이 으뜸이요, 대숲 밑에서 나는 것이 다음이며 자갈밭에서 나는 것이 그 다음, 누른 모래땅에서 나는 것이 또한 그 다음간다.

차 만들기(造茶)

새로 딴 차는 먼저 오래된 잎과 억센 줄기와 부스러기를 골라내고, 너비 두자 네 치정도의 노구솥(흙과 돌로 쌓은 불 때는 아궁이)에 차 한 근반을 덖는다.
솥이 뜨겁게 달았을 때를 기다렸다가 차 잎을 넣기 시작하여 얼른 덖어야 하는데, 불길을 늦춰서는 안 된다.
익기를 기다렸다가 점차 불기를 줄이고 체에 담아서 몇 차례 가볍게 흔들고 도리깨로 골고루 두드려 준다. 그런 다음, 다시 솥에 넣고, 불기를 차차로 줄이면서 화력을 낮추어야 한다. 이렇듯 불기를 적당히 조절 정성을 다하는 법도를 갖추게 되면 빛깔이 아름답고 향이 은은, 그 속에 그윽하고 미묘한,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무엇이 담기게 된다.
그 미묘한 기운을 규명할 수 없어도 차의 신령스러운 모든 맛은, 덖을 때 갖춰지는 것이다.

차 가리기(辨茶)

차의 오묘함은 처음 만들 때 정갈한 만들기에서 비롯되며 차 만들기에서 차 맛의 우열이 가려진다. 차에는 향기의 흡착성이 있기 때문에 정갈해야 한다.
차가 맑은가, 흐린가는 불과 물에 달려 있다.
불기운이 뜨거우면 향기가 맑아지는데, 솥에도 신령한 기운이 베이게 된다. 불길이 너무 거세면 익기 전에 타 버리고, 나무를 더디게 지피면 비취색을 잃게 된다.
불을 너무 오래 지피면 지나치게 익어 버리며, 일찍 들어내면 언저리는 설익고 익으면 누렇게 변한다. 익으면 노랗게 되고 설익으면 검게 된다.
이런 도리를 따르면 차 맛은 달고, 이런 도리를 어기면 맛이 나가버려서 떫어진다. 흰 반점을 띤 것은 무방하지만 태우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차의 저장(藏茶)

차를 만들어 처음 말리려면, 먼저 뚜껑이 있는 통이나 옛합(盒)에 담고 겉을 종이로 싸서 주둥이를 봉한다.
그런 다음 사흘이 지나 차의 본성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다시 약한 불에 쬐여 바싹 완전히 말린 후, 식기를 기다렸다가 병에 담는다.
공기가 통하도록 가볍게 쌓아올려 대나무 껍질로 팽팽히 엮고 풀과 대나무 껍질 종이 등으로 병의 주둥이를 겹겹으로 단단히 봉한다. 다음, 잿불에 넣어 달궈진 벽돌 식힌 것으로 눌러서 다육기(茶育器)속에 넣어둔다.
차를 보관 할 때는 바람에 쏘이거나 불에 가까이 하지 말도록 삼가 해야 한다.
바람에 쏘이면 차가 쉽게 식으며, 불기에 가까우면 이내 누렇게 된다.

불 지피기(火候)
차를 달이는 요령은 불 지피기가 앞서야 한다.
불을 지펴 화로 불이 빨갛게 달아오르면 차 주전자를 얹고, 부채질을 한다. 가볍게 흔들고 세게 흔들기를 반복하다가 물 끓는 소리가 나면 빨리 한다.
탕관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나가를 기다려 차츰 심하고 빠르게 하는데, 이것이 「문무(文武)살피기」란 것이다.
문화(文火)는 약한 불인데 지나치면 물의 성미가 유순하여지고, 유순하면 차는 가라앉는다.
무화(武火)는 강한 불인데 지나치면 불의 성미가 사나와지고, 사나와지면 차가 물을 제압하게 된다.
모두 중화에 벗어나는 것으로 차 전문가의 요지가 못된다.
끓는 물 분별하기(湯辨)

끓는 물에는 크게 세 가지의 분별법과 열다섯 가지의 작은 분별법이 있다.
첫째는 모양 보고 분별하기(形辨)라 하며, 둘째를 소리 듣고 분별하기(聲辨)라 하고, 셋째를 김 보고 분별하기(氣辨)라고 한다.
모양의 분별은 속을 분별(內辨)하는 것이요, 소리는 겉을 분별(外辨)하는 것이요, 김은 재빨리 분별(捷)하는 것이다.
게 눈처럼 ? 새우 눈처럼 ? 물고기 눈처럼 ? 구슬이 연이어진 것처럼 물이 끓을 때 기포가 생기는 것은 모두 맹탕으로 한다. 곧바로 물이 솟구치며 용솟음치듯이 끓기에 이르면 물의 기운이 모두 사라지니, 이것을 순숙(純熟)이라 하는 것으로 순수하게 익혀지는 것이다.
또한 첫소리 ? 굴림소리 ? 떨림소리 ? 놀램 소리와 같은 소리가 들리면 모두 맹탕으로 삼는다. 더 나아가서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바야흐로 이것이 결숙(結熟)이라는 것으로 매듭을 짓게 되는 것이다.
김이 한 가닥, 두 가닥, 서너 가닥씩 오르면서 어지러운 가닥이 떠오르듯 왕성한 기운이 분간되지 않을 때 어지러운 얽힘은 모두 맹탕으로 여긴다.
곧 김이 곧바로 치솟아서 이어지기에 이르면, 바야흐로 이것이 경숙(經熟)이라는 것으로 익는 것이 끝난 것이다.

쇠한 물과 어린 물 쓰기 (湯用老嫩)

떡차 달이기에는 애벌 끓인 물이 어린 물(嫩水)이고 솟구치며 끓은 물이 쇠한 물(老水)이다. 채군모(蔡君謀: 송나라 최고의 차책 ‘다록(茶綠)을 지은 사람)는 어린 물을 쓰고 쇠한 물은 쓰지를 않았다.
대개 옛 사람들의 제다법을 이어받아 차를 만들 때 차가 만들어지면 반드시 맷돌질하고, 맷돌질하면, 반드시 갈며, 갈면 반드시 얇은 비단으로 걸렀다. 이렇게 하면 차는 미세한 가루로 변한다. 이 가루를 조제하고 도장을 찍어 용봉단차(龍鳳團茶)를 박아내고 탕면을 보게 되면 차의 신기(神氣)가 곧바로 뜬다.
이것은 어린 물을 쓰고 쇠한 물을 쓰지 않는 까닭이다.
요즈음 차 만들기는 비단으로 거르거나 맷돌질을 할 틈이 없어서 모두 형체를 갖추지 못하는데, 여기에 쓰일 탕수는 모름지기 순숙(純熟)되어야 원래의 신기가 비로소 드러난다.
그러므로 탕수라면 모름지기 다섯 벌 끓어야만 차의 세 가지 기이함이 주효한다고 말한다.

차 끓이기(泡法)

물이 익기를 살폈다가 곧 들어 올려 먼저 소량을 다기에 부어 다기의 찬 기운을 가셔낸 다음 물을 버리고 찻잎을 넣는다. 차의 많고 적음을 알맞게 짐작하여 떨어뜨리는데, 중용이 지나치거나 공평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차가 많으면 맛이 쓰고 향기는 흐리며, 물이 많으면 빛깔은 맑아도 맛이 적다.
두 번 마신 뒤 다시 쓸 때에는 그릇을 찬물로 흔들어 씻어서 서늘하고 깨끗하게 한다. 그렇게 안하면 차의 향기가 줄어든다.
탕관이 불에 익으면 차의 신기가 건실하지 않고, 찻병이 맑으면 물의 성미는 언제나 신령스럽다.
차와 물이 융합되기를 잠시 가다린 뒤에 잔질하여 나누어 마시기를 베푼다.
나누기가 이른 것도 마땅치가 않고 늦게 마시는 것도 마땅치가 않다. 빠르면 차의 신기가 덜 일어나고, 더디면 묘한 향기가 앞서 사라진다.

차 넣기(投茶)

차를 넣는데도 순서가 있기 때문에 그 마땅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먼저 차를 넣고 끓인 물을 뒤에 붓는 것을 하투라고 한다.
끓인 물을 절반 붓고, 차를 넣고 다시 끓인 물로 채우는 것을 중투라고 한다.
끓인 물부터 먼저 붓고, 차를 뒤에 넣는 것을 상투라고 한다.
봄, 가을에는 가운데 떨어뜨리기(中投)를 하고, 여름에는 위에 떨어뜨리기(上投)를 하며, 겨울에는 밑에 떨어뜨리기(下投)를 한다.

차 마시기(飮茶)

차 마시기는 손님이 적은 것이 귀하다. 손님이 많으면 떠들썩하고, 떠들썩하면 아취가 모자란다.
홀로 마시는 것을 신령스럽다, 고 한다.
손님과 둘이 마시는 것을 좋다, 즉 승(勝)이라고 한다.
서너 명이 마시는 것을 운치가 있다 한다.
대 여섯 명이 마시는 것을 들뜬다, 즉 범(泛)이라고 한다.
일곱 여덟 명이 마시는 것을 헤벌어진다, 즉 시(施)라고 한다.

차 향기(香)

차에는 진향(眞香)이 있고, 난향(蘭香)이 있고, 청향(靑香)이 있고, 순향이 있다.
겉과 속이 한결같은 것을 순향 이라고 한다.
설지도 않고 익지도 않은 것을 청향이라고 한다.
불기가 고르게 멈춰진 것을 난향이라고 한다.
곡우 전에 신기가 갖추어진 것을 진향이라고 한다.
또 함향(含香) ? 누향(漏香) ? 부향(浮香) ? 문향(問香)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가 바르지 못한 냄새이다.

차 빛깔(色)

차는 맑고 푸른 것이 빼어난 것이다. 물결은 희고 쪽빛 나는 것이 좋다. 누르거나 검거나 붉거나 어두운 것은 모두 품수에 넣지를 않는다.
눈 같은 물결이 으뜸이요, 비취색 물결이 중품이며, 누른 물결이 하품(下品)이다.
금방 뜬 샘물에 살아있는 불길로 차를 달이는 것은 고요하고도 교묘하며, 옥 같은 차와 차가운 물결은 잔의 절묘한 기예를 맡는다.

차 맛(味)

차의 맛은 달고 윤기가 좋은 것이 상등이며, 쓰고 떫은 것이 하등이다.

다른 것과 섞이면 참된 성품을 잃는다(點染失眞)

차에는 본시부터 진향이 있고, 진색이 있고, 진미가 있는데 한 번 물들게 되면 곧 그 참됨, 진성을 잃는다.
예를 들어 물 속에 소금기가 섞였거나 차에 향료가 묻었거나 잔에 과실기가 묻은 것은 모두 진성을 잃은 것이다. 즉, 순수한 물과 순수한 찻잎과 깨끗한 잔의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차 맛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변질차의 안 쓰기(茶辨不可用)

차를 처음 만들면 푸른 비취색이다.
그러나 거두어 간직하는데 그 방법이 옳지 못하면, 첫 번째는 녹색으로 변하고, 두 번째는 누른빛으로 변하고, 세 번째는 검게 변하고, 네 번째는 흰 빛으로 변한다.
이것을 먹으면 위장이 차가와 지고, 심지어는 파리한 기운이 쌓이는 것이다.

샘물의 성품(品泉)

차는 물의 신령(神)이요, 물은 차의 형체(體)이다. 다시 말해서 차는 물의 정신이고 물은 차의 본체다.
참된 물(眞水)이 아니면 그 영묘함(神)이 나타나지 않으며, 정갈한 차(精茶)가 아니면 그 형체(體)를 엿볼 수가 없다.
산 봉우리의 샘물은 맑고 가벼우며, 산 밑의 샘물은 맑고 무겁다. 돌 속의 샘물은 맑고 달며, 모래 속의 샘물은 맑고 차가우며, 흙 속의 샘물은 싱겁고 희다.
누른 돌 틈에서 흐르는 물이 좋고, 푸른 돌에서 솟아오른 물은 쓸모가 없다.
흘러서 움직이는 물은 고여 있는 물보다 좋고 그늘에 덮여 있는 것은 햇볕에 있는 것 보다 순수하다.
순수한 것은 원래 맛이 없고, 참된 물(眞水)은 향기가 없는 것이다.

우물물은 차에 못마땅하다(井水不宣茶)

<다경>에서 말하기를 ‘산속에서 솟는 물이 상품이요, 강물이 중품이요, 우물물이 최하품 이다.’ 라고 하였다.
우선 주위에 가까운 산이 없고 또한 샘물이 없을 때는, 봄에 내리는 매우(梅雨)를 받아두는 것이 마땅하다.
그 맛이 달고도 순하여 온갖 생물을 성장시키고 기르는 물로서 뛰어나다.
눈물(雪水)은 비록 맑을 지라도 무겁다. 그리고 지라(脾)와 위장에 어둡고 찬 기운을 남기기 때문에 너무 많이 이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물의 저장(貯水)

물 담는 항아리는 반드시 그늘진 마당에 놓고 비단으로 덮어서 별빛이나 이슬의 기운을 받을 수 있게 하면, 뛰어난 영기가 흩어지지 않고 언제나 신령스러운 기운이 간직된다.
가령, 나무나 돌로 눌러두고 종이나 대껍질로 봉하여 햇볕 아래서 쬐면 밖으로는 정신이 소모되어 흩어지고 안으로는 그 기운이 막혀버려 물의 신성스러움을 해치게 된다.
차 마실 때에 제일 귀중한 조건은 차는 신선하고 물은 영험한데, 차가 그 신선도를 잃거나 물이 그 영기를 잃는다면 도랑물과 다를 것이 무엇이랴.

찻그릇(茶具)

육우는 차를 다릴 때에 은 바가지를 썼는데, 너무 사치스럽다면서 훗날에는 자기(磁器)를 썼으나, 또한 오래 견디지 못하여 다시 은으로 돌아갔다.
내 생각에 은이란 권세 높은 화려한 집에서나 쓸 만하고 사찰이나 선비의 집, 돌산에 있는 집이나 띠집에서는 그저 주석 바가지가 어울리는데, 또한 빛깔과 맛의 손상도 없다. 구리나 쇠로 된 다구는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

찻잔(茶盞)

잔은 눈처럼 흰 것이 으뜸이다.
쪽빛이 나면 차의 빛깔을 손상시키므로 그 다음이다.

찻잔 닦는 행주(拭盞布)

차 마시기의 전후에는 가는 베수건을 갖추어 잔 닦기에 쓴다.
그 밖의 것은 더러워지기 쉬워서 쓰기에 마땅치가 않다.

차의 보위(茶衛)

만들 때는 정성스레, 저장할 때는 건조하게, 물 끓일 때는 청결하게 한다.
정성스럽고(精), 건조(燥)하고, 청결(潔)하게 하면 다도는 다 된 것이다.

발문(跋文)
庚寅中春 休菴病禪 雪窓擁爐 謹書(경인중춘 휴암병선 설창옹로 근서)

무자년(戊子年 )어느 비 오는 날, 스승을 따라 지리산의 칠불아원(七佛亞院)에서 등초(謄抄)하여 내려와 다시 정서하고자 하였으나 병 때문에 아직 맺지를 못하였다.사미 수홍이 시자 방에 있을 때 다도를 알고자 정초하였으나 그 역시 병으로 끝내지 못한지라 참선의 여가에 억지로 붓에 명령하여 마침내 이루었다.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는 것이 어찌 홀로 군자만이 할 짓이던가. 총림(叢林)에는 간혹 조주풍류(趙州風流:당나라 조주종심스님의 차 마시는 풍류를 말한다)가 있으나 다도를 다 알수 없기에 베껴서 보이는 것이다. 외람된 일이로고.
경인년(庚寅年1830) 중춘 암자에서 쉬는 선승이 눈 내리는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삼가 적노라.

위 글은 초의선사의 <다신전>의 발문이다. 발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초의선사는 지리산의 칠불암에 있는 <만보전서>에서 차에 관한 기록 (다경채요) 부분을 베꼈고 대흥사에 돌아와서 몸이 불편하여 미루다가 마침내 완성, <다신전>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다음은 <다신전>이라 이름 붙이게 된 동기를 김명배(金明倍)의 <다론>으로알아본다.

···중략 초의선사가 <다경채요>를 <다신전>이라고 개칭한 것은 ‘어린 물과 쇠잔한 물의 쓰기’ ‘물거품 다루기’ ‘샘물의 품수’에 적힌 다신(茶神)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신이라는 용례는 <신당서(新唐書)>의 육우전(陸羽傳) 편에서 육우를 다신으로 추앙했다는 글이 있다. 또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차의 독촉장에서는 햇차(新茶)의 뜻으로 다신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다.

초의선사의 <다신전> 원본은 가로 19cm, 세로 14cm의 작은 책자로 한지 8장에 기술되어있다. 책의 내용은 채다(採茶)에서부터 제조, 보관, 탕제, 다구, 다위, 다도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기록되어 있다. 이 <다신전>은 <동다송>과 같이 누군가의 부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초의선사 스스로 총림의 차 풍습을 널리 알린다는 의도로 기록한 것이라 보아진다.
다음은 범해스님이 초의선사가 정성으로 만드는 차를 노상 가까이에서 지켜보다가 ‘초의차’라 이름 붙여 읊은 한 수 시를 싣는다. 차를 만드는 공정을 세밀하게 관찰 기록한 시로써 아름답기 그지없다.

[초의 차]

곡우 초 어느 맑은 날에
아직 피지 않은 노오란 싹
빈 솥에서 정갈하게 덖어
밀실에서 적당히 잘 말려낸다
잣나무 그릇에 네모와 둥글게 찍어
대나무 껍질로 꾸려 싸고 잘라서
바깥 기운 엄중히 막아 저장하니
한 잔에도 향기 가득히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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